손정빈님이 쓴 리뷰
- 3년 전
봉준호만 할 수 있는 것
간결하고 명쾌하다고 해서 깊이가 없는 건 아니다. 은밀하게 드러내는 게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것보다 우위에 있는 방식도 아니다. 중요한 건 합당한 방식으로 정확하게 짚어내는 일이다. '옥자'(감독 봉준호)는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던 '마더'(2009), 넓이를 짐작키 어려웠던 '설국열차'(2013)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목표에 도달한다. 현 세계를 추동하는 시스템을 시종일관 활기차고 유머러스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그 지적에 설득력까지 갖추는 건 아무 영화에서나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다.
'옥자'는 또 다른 거대 동물 영화 '괴물'(2006)처럼 그 자체로 만듦새가 좋은 오락영화이기도 하다(봉 감독의 전작 중 '옥자'와 가장 유사한 맥락의 작품은 역시 '괴물'일 것이다). 새삼스러운 언급이지만, '봉준호 영화'는 달려야 할 때와 걸어야 할 때를 안다. 당겨야 할 때와 밀어야 할 때를 알고, 뜨거워야 할 때와 차가워야 할 때를 안다. '미자가 납치당한 친구 옥자를 구하러 떠난다'라는 평면적 서사는 봉 감독 특유의 세밀한 설정과 촘촘한 구성을 만나 직관적으로 재밌는 작품으로 부활한다.
초국적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은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시킨 슈퍼돼지를 세계 26개국 축산업자에게 맡겨 키우게 한다. 미자(안서현)·희봉(변희봉)과 함께 한국의 산 속에서 살고 있는 옥자도 미란도의 작품 중 하나다. 미란도의 CEO 루시(틸다 스윈턴)는 슈퍼돼지를 가공해 식품으로 팔기 직전, 홍보의 일환으로 가장 아름답게 자란 슈퍼돼지를 미국 뉴욕에서 공개하기로 한다. 옥자가 미란도 직원들에 의해 납치당하자 미자는 옥자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직접 뉴욕으로 향한다.
뛰어난 기술은 때로 감정도 만들어낸다. '옥자'의 중추는 역시 옥자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슈퍼돼지 옥자가 스크린 넘어 관객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을 필요로 하는데, '옥자'의 옥자는 러닝 타임 내내 외관상 어떤 허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다. 미자와 옥자의 사랑과 우정이 관객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관객 또한 옥자에게 마음을 쏟을 수 있을 만큼 이 거대 동물이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게 하는 기술 덕분이다.
영화는 소녀와 친구의 모험담이자 멜로드라마다. 권력과 싸우고 돈에 맞서고 일그러진 인간 행태를 일갈하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방위적으로 세계 중심 체제를 비판하는 풍자극이다. 여기에 비거니즘과 에코페미니즘까지 녹여냈다('옥자'는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할리우드의 정형화한 시선도 비꼰다). '옥자'의 정교한 각본은 봉 감독이 영화 연출가이기 전에 얼마나 뛰어난 작가인지를 알게 한다. 다양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질적일 수 있는 요소들이 어느 것 하나 돌출되지 않게 자연스럽게 오락영화 틀 안에 들어오는 경험을 주는 작품은 자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작비 5000만 달러 때문이 아니라 봉 감독의 또 한 번 확장된 세계관이 담겼다는 점에서 '옥자'는 대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 이후 '설국열차'(2013)까지, 때로는 깊게 때로는 넓게 파들어가며 자기 영역을 구축했다. 인류의 미래를 고민한 '설국열차'가 시야를 가장 넓게 확장한 사례였다면, '옥자'는 전작에서 한발 더 나아간 작품이다. 그는 이제 종(種)의 문제를 넘어 세계 전체를 본다. 이를 테면 그는 옥자라는 동물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옥자라는 생명에 관해 말한다.
'옥자'의 유머는 필연적이다. 상영 시간 내내 흐르는 유머는 '옥자'가 메시지에 함몰되는 걸 막는 것과 동시에 이 메시지를 더 명징하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번 작품이 전작들과 비교해 더 직접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영화인만큼 이 무게감을 상쇄해줄 요소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웃음이다. 이 웃음들은 극 종반부 미자와 옥자 앞에 닥치는 비극의 크기를 극대화한다. 이 극명한 대비가 주는 효과는 관객의 눈물을 짜내기 위한 게 아니다. 봉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들면서 했던 고민들을 관객 또한 비슷하게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독보적인 캐릭터는 없다. 미자·루시·죠니 등 '옥자'의 인간들은 봉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유독 정형화돼 있다. 배우들은 튀지 않지만, 정확한 연기로 관습적 캐릭터마저 살려낸다. 굳은 의지를 담은 눈빛이 인상적인 안서현은 '괴물'의 고아성을 떠올리게 하는 총명한 연기를 선보인다. 틸다 스윈턴은 단 몇 장면만으로도 히스테릭한 사이코패스를 표현하는 내공을 발휘한다. 변희봉·제이크 질렌할·폴 다노·스티븐 연 등도 안정적인 연기로 극을 무리 없이 이끈다.
'옥자'가 봉 감독의 최고작은 아니다(여전히 그의 최고작은 '살인의 추억'이거나 '괴물' 혹은 '마더'를 꼽기도 할 것이다). 봉준호이기때문에 그 기준이 치솟을 뿐 '옥자'는 감정적이거나 혹은 기술적인 부분 모두에서 높은 만족도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그저 그런 스릴러 영화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는 최근 한국영화계에 '옥자'의 존재는 유독 소중하다.
(글) 손정빈 기자2개0개 - 3년 전
진짜 광주영화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택시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기에 언제나 어디에서나 이방인이다. '택시운전사'(감독 장훈)라는 제목이 곧 이 작품의 방향이다. 영화는 택시 기사와 그가 태운 독일 기자가 1980년 5월 광주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런 설정이라면 보통 영화는 기자의 활약상을 다루면서 그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주로 피해자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택시운전사다. 이 제목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당시 그곳에서 벌어진 참상의 현장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외부인의 눈으로 보겠다는 일종의 의지 표현이다.
택시 기사 만섭(송강호)의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다소 길게 보여주는 건 일반적인 캐릭터 구축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상식적인 선에서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속물인 평범한 사람이라고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만섭은 곧 당시 광주 현장에 있지 않았던 모든 관객이 될 수 있다. '택시운전사'는 필부필부의 눈으로 그때의 광주와 광주 사람들을 봤을 때 그게 무슨 일이었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느껴보자고 제안하는 작품이다.
심각해보이는 설정이지만, '택시운전사'는 사실상 '선(先)웃음·후(後)감동' 흥행 공식을 답습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1부에 해당하는 초반 60분이 송강호의 개인기를 활용한 재미 파트라면, 2부에 해당하는 77분은 눈물 파트다. 익숙하고 상투적인 설정이지만, 그만큼 위력적이다. 대배우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송강호는 대부분 장면에서 유효타를 날린다. 토마스 크레취만·류준열·유해진의 호흡은 인간적이어서 감동적이다. 게다가 최근 관객은 거대 권력에 의해 짓밟힌 약자의 이야기에 함께 분노할 준비가 돼 있다. 이건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영화다.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건 이 작품의 큰 미덕이다. 이 의외의 담백함은 신파 서사에 대한 일부 관객의 반감을 의식한 의도적 연출이 아니다.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가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홀로 서울로 올라가는 이방인의 미안함은 분명 통곡과는 거리가 멀다. '택시운전사'는 가해자를 향한 울분을 거침없이 토해내기보다는 피해자들의 넋을 어루만져주려는 시도에 가깝다. 과장되지 않은 감정은 오히려 공감의 크기를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만 상업영화로서 무난하지만, 이른바 '광주영화'로서 '택시운전사'가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아픔을 무릅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함으로써 작은 희망을 이어간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은 영화일 것이다. 이 메시지는 그것 자체로 도덕적·윤리적으로 옳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합당한 평가이겠지만, 그것이 관객에게 광주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거나 광주를 전에 없던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광주에 대한 '택시운전사'의 시선은 오히려 동어반복에 가깝다.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관객이라면 '택시운전사'의 메시지 정도는 이미 체화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한계는 '택시운전사'가 150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상업영화로써 정체성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흥행이라는 절대 목표는 보편성을 가장한 편하고 쉽고 안일한 결정으로 귀결하고, 이런 선택들은 대체로 영화의 날을 무디게 할 뿐만 아니라 생기마저도 잃게 한다. 매우 이례적으로 개봉일 한 달 전에 열린 시사회(개봉 한 달 전에는 보통 제작보고회를 한다), 이후 쉬지 않고 이어진 '택시운전사' 대대적인 홍보 활동은 이 작품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인지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방증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송강호의 존재에 관한 부분이다. 최근 '택시운전사'를 비롯해 그를 캐스팅하는 데 성공한 일련의 작품들은 송강호의 연기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게 수많은 작품들이 송강호를 잡으려는 이유이고, 이 의존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하다. 물론 배우 또한 영화의 일부분이기에 특정 배우의 부재를 가정하는 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송강호를 제외한 다른 요소들의 완성도를 높이지 못한 채 그의 연기력으로 버티는 식의 연출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10년 전 '화려한 휴가'가 있었다. 5년 전 '26년'이 있었다. '화려한 휴가'는 상업영화 장르 안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처음 다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그 의미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한 작품이었다. '26년'은 그때의 울분을 액션스릴러물로 전환한 시도가 인상적이었지만, 완성도는 역시 기대 이하였다. '택시운전사'는 분명 앞선 두 작품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진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움직임이 결코 진짜 '광주영화'가 도착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 손정빈 기자2개0개 - 3년 전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 마음들
'더 테이블'(감독 김종관)은 정유미·정은채·한예리·임수정이 한국 영화계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각인한다(여기에 김혜옥까지). 영화는 구조상 많은 부분을 배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이 작은 이야기가 속에 품은 다양한 결을 이해하는 연기로 극을 짊어진다. 그러니까 이 배우들은 대사가 담지 않은 것들까지 눈에 담는다.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네 차례의 대화는 이들의 흔들리는 눈빛, 어색한 손짓, 흐릿한 미소 몇 번으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유명 배우가 된 '유진'(정유미)은 오래 전에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를 한 카페에서 다시 만난다. '경진'(정은채)은 우연히 만나 잠시 데이트했지만,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던 어떤 남자와 몇 개월 만에 다시 한자리에 앉는다. 결혼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은희'(한예리)는 가짜 엄마 역할을 할 중년 여성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결혼을 앞둔 '혜경'(임수정)은 전 남자친구를 만나 잠시 대화한 뒤 헤어진다.
김종관 감독의 전작 '최악의 하루'(2016)에서 한 여자는 하루 동안 여러 장소를 옮겨다니며 몇 명의 남자를 만난다. 신작 '더 테이블'은 반대다. 네 명의 여자는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한 명의 남자(혹은 여자)와 대화한다. 전작이 단편소설이라면, 신작은 산문시다. 전작이 어떤 이의 긴 하루로 순간의 감각을 잡아낸다면, 신작은 순간의 대화로 누군가의 긴 역사를 이끌어낸다. 이 작품에 '더 테이블'이라는 제목이 붙은 건 그 위를 오간 각기 다른 사람의 수많은 이야기, 그러니까 거기에 그들이 지나온 삶이 쌓여있어서다.
유진이 주변의 눈을 피해가면서 헤어진지 수년이 지난 남자친구와 해후한 건 배우로 살면서 받은 어떤 상처때문일지도 모른다. 경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그 남자에 대한 왠지 모를 섭섭함에는 청춘의 불안이 스며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희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처음 본 중년 여성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털어놓는 건 문득 생겨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혜경이 전 남자친구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과거 연인이었던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이 어쩌다가 이별했는지 추측하게 된다.
관객이 그들의 대화 속에서 보게 되는 건 러닝타임 70분 안에 담기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삶들이다. 누가 누구를 아프게했건 비판도 비난도 없다. 쉽게 긍정하거나 비관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은 속상하고(유진), 애틋하고(경진), 아련하고(은희), 안타깝다(혜경). 그 마음들이 그들의 의식하지 않은 말과 표정에 있음을 잡아챌 줄 아는 예민한 감각은 '더 테이블'을 단순한 옴니버스 형식의 프로젝트로 남겨두지 않고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 다시 말해 감독이 얼마나 사람들과 그들의 인생 하나한를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보는지 알게 하는 작품이다.
카메라는 네 여자의 얼굴이 보여주는 희미한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칠까 그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다. 정유미와 정은채와 한예리와 임수정 또한 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정유미는 주변의 오해에 점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는 유진의 피로감을 무표정에 담고, 정은채는 모든 게 불확실한 시기에 대한 경진의 짜증을 나른한 말투에 올려놓는다. 한예리는 은희의 슬픔을 사무적인 화법 속에서 은근히 드러내고, 임수정은 혜경의 미안한 마음을 장난스럽게 에두른다. '더 테이블'을 완성시켜주는 건 결국 배우들이다.
카페에 잠시 모였던 이들은 대화를 마친 뒤 각자 다른 결론을 가지고 밖으로 나선다. 누군가는 실망하고, 어떤 이는 설레이고, 또 다른 사람은 안도하고, 혹은 씁쓸할지도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특정한 상황에 놓인 네 사람이지만, 진짜 말하고자 하는 건 그보다 더 많은 사람과 삶이다. '더 테이블'을 작은 영화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 영화다.
(글) 손정빈 기자1개0개 - 3년 전
성공한 실패에 관한 이야기
'덩케르크'(감독 크리스토퍼 놀런)는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1940년 5월 연합군 40만명이 프랑스 덩케르크 해변에서 독일군에 의해 고립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사건을 흔히 '덩케르크 철수 작전'으로 그럴싸하게 명명하지만, 철수는 사실상 전투에서 진 것을 의미한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이건 적과 싸우지 않고 도망친 역사다. 승리를 향한 의지는커녕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는 한 병사의 모습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는 상징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 실패를 체험하게 한다. IMAX·65㎜ 카메라를 활용한 압도적인 영상, 당시 실제로 쓰인 전투기를 사들일 정도로 컴퓨터그래픽을 최대한 억제한 집요한 연출, 106분 내내 온몸을 조여오는 듯한 음악과 음향. 두 시간이 안되는 시간에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의 하루, 하늘 위 한 시간을 모두 절절하게 느끼게 하는 경험이 '덩케르크'다. 그리고나면 질문 하나가 던져진다. '왜 이 처절한 패배를 경험해야 하는가.'
이 패배의 정체는 좌절에 휩싸인 덩케르크 해변의 공기다. 전투 결과는 이미 패배로 결정, 문제는 승패가 아니라 오직 생사다. '다크나이트' 시리즈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놀런의 전작은 화려함으로 꽉 차있었다. '덩케르크'는 반대다. 대사를 줄였고, 독일군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피도, 진한 전우애도, 현란한 전투 시퀀스도 없다. 이는 형식적 실험이라기보다는 고립된 이들이 느끼는 무력감을 정확하게 드러낸 표현에 가깝다.
'덩케르크'는 절망의 끝으로 전진한다.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병사들에게 밑으로는 어뢰를, 위로는 폭격기를 선사한다. 이들을 돕기 위해 덩케르크 해변으로 향한 민간 선박에 탄 사람들에게는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준다. 독일 전투기를 격퇴하기 위해 출발한 스핏파이어 세 기 중 두 기는 격추당했고, 나머지 한 기에는 연료가 없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포기하고 멈춰버리든지, 아니면 뭐가 됐든 끝까지 버텨보는 것이다.
이때 놀런 감독의 전작이 소환된다. '인터스텔라'는 "우린 답을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라며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한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누구든 영웅이 될 수 있어. 소년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주며 세상이 끝난 건 아니라고 다독이는 것처럼 사소한 일을 하는 사람도 영웅이지"라고 했다. 그의 영화들은 무작정 낙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을 쉽게 내던진 적이 없다. '덩케르크' 또한 그렇다.
'덩케르크'에 없는 또 한 가지는 캐릭터다. '인터스텔라'와 '다크나이트'에는 각각 '쿠퍼'와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있었다. 영웅 서사를 만들던 놀런 감독은 이번엔 '공동체 서사'로 나아간다. 카메라가 쫓는 건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러니까 '덩케르크'에는 주인공이 없는 게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코트를 덮어주며 어깨를 다독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이 움직임은 결국 작은 변화(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않게)를 이끈다.
이들의 행동은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숭고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판단 아래 행해진다. 토미는 우연히 자신과 긴 시간 함께한 국적 불명의 동료를 위험을 무릅쓰고 지키려 한다. 도슨은 언제라도 배를 돌려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파리어가 전투기를 퇴각했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그는 복귀할 연료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한 가지를 위해 모든 걸 걸었다.
'덩케르크'는 전쟁을 통해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분출하는 대신 이 세계를 오래 지속 가능하게 하는 이상들을 단단히 새겨넣는다. 사령관은 부하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끝까지 남아 마지막까지 연합군의 귀향을 돕는 리더다. 도슨은 기성세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세계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책임지고 희생할 준비가 된 어른이다. 피터는 살아남은 자의 희망을 지키고, 떠난 이의 넋을 기려 인간의 존엄을 지킬 줄 아는 청년이다. 누구도 군인을 비난하지 않고, 살아온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우리의 패배'를 함께 위로한다.
놀런의 새 영화는 갈수록 절망과 좌절의 크기를 키워가며 불화하는 세계를 향한 메시지다. 2014년 4월16일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또 큰 좌절을 겪은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크든 작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모든 이에게 가닿을 수 있다. 놀런은 관객이 거대한 실패를 경험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이뤄낼 수 있는 작은 성공을 맛보게 해 미래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한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피해를 최소화해 덩케르크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연합군은 이를 발판 삼아 다시 한번 독일군에 맞섰고, 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덩케르크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지켜내려 안간힘 쓴 그 작은 희망이 이 승리의 토양이 됐다. '덩케르크'는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이 실패에 한 단어가 더 붙어야 한다. 이건 성공한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글) 손정빈 기자2개0개 - 3년 전
MCU 시대 교체의 서막
마블 스튜디오는 2008년 5월 '아이언맨'을 내놓은 이후 10년간 승승장구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15편의 영화로 이들이 벌어들인 돈은 자그마치 117억6840만 달러(약 13조5000억원, '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단순히 흥행을 떠나서도 마블의 영화들은 작품 자체로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압도적인 기술력은 말할 것도 없고, 20여명의 영웅 캐릭터를 버릴 것 없이 살려내는 그들의 능력은 슈퍼 히어로 장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오락영화의 새 기준을 마련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아쉬울 게 없는 마블의 한 가지 약점은 그들의 세계관을 유지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 중 하나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소니픽쳐스가 판권을 소유한 스파이더맨이다. 마블은 소니와의 긴 협의 끝에 스파이더맨을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2016)에 합류시켰고, 곧바로 솔로 시리즈 작업에 들어갔다. 스파이더맨 없이도 잘해왔고, 최고 인기 캐릭터 아이언맨이 건재한데다 블랙 팬서(2018년 2월)·캡틴 마블(2019년 3월) 등 새 영웅의 본격 데뷔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마블은 왜 그토록 스파이더맨을 원했을까.
'스파이더맨:홈 커밍'(감독 존 웟츠)은 답변을 담은 작품이다. '청소년 영웅 성장물'의 유머러스함 속에 담긴 메시지는 일종의 선전포고다. 새 스파이더맨 톰 홀랜드는 개봉 전 인터뷰에서 이 시리즈가 앞으로 두 편 더 제작될 거라고 누설한 바 있는데, 솔로 시리즈 3부작이 만들어진 사례가 MCU를 대표하는 두 캐릭터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외에 없다는 건 스파이더맨 '3부작'의 의미를 격상한다. 게다가 스파이더맨과 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 캐릭터가 MCU의 상징 아이언맨이라는 건 더욱 의미심장하다.
얼떨결에 참가한 '시빌 워' 이후 피터 파커는 들뜬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어벤져스와 같은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고, 학교가 끝나면 토니 스타크에게 받은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 무작정 거리를 활보한다. 그러나 그의 어설픈 '영웅 놀이'는 사건 해결은커녕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시민들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린다. 스타크에게 슈트를 뺏긴 파커는 악당 벌처(마이클 키턴)의 비밀을 알게 되고, 과거에 직접 만든 어설픈 스파이더맨 옷을 입고 다시 한 번 사건 해결에 나선다.
벌처는 잔챙이 악당이다. 어벤져스가 우주 최강 타노스와 결전('어벤져스:인피니티 워' 2018년 5월)을 앞둔 상황에서 외계 물질로 무장하고 하늘을 나는 악당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중요한 건 파커의 성장이다. '시빌 워'에 참가했을 때가 14살이었고, 이제 겨우 15살이 된 천방지축 '고등 영웅' 혹은 '인턴 영웅'이 '영웅병'을 스스로 치유하고, 영웅으로서 책임감과 그에 따르는 부담감을 아주 조금은 깨닫는 과정이 바로 '스파이더맨:홈 커밍'이다. 파커가 여자친구와 홈 커밍 파티에 가는 날 여자친구를 홀로 내버려두고 벌처를 뒤쫓는 상황은 그가 앞으로 영웅으로서 어떤 삶을 살게될지 보여주는 정확한 설정이다.
과정이 어찌됐든 스파이더맨은 커나가야 한다. 중요한 건 이 성장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는 외삼촌의 죽음이 있었다면("큰 힘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 존 웟츠의 새 작품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영웅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멘토링이 있다. 마블은 부모가 없는 파커와 자식이 없는 스타크를 유사 부자 관계로 맺어주고(스타크는 파커의 경거망동을 꾸짖다가 "이건 내가 아버지에게 듣던 말인데"라고 말한다), 사실상 파커로 하여금 스타크의 대(代)를 잇게 한다.
마블은 의도적으로 파커를 스타크와 닮은 게 매우 많은 인물로 그려냈다. 말이 많고 빠르며,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까불거리는 성격은 사실 스타크가 '아이언맨' 시리즈 내내 보여줬던 모습이다. 결국 화를 부르고마는 파커의 공명심도 마찬가지다. 영웅이라는 정체를 숨기지 않고, 아이언맨 슈트를 입고 파티에 나타나던 사람이 바로 스타크였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만담 개그 수준의 유머코드는 어떠한가. 파커 또한 스타크처럼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이기도 하다. 가진 재산에 차이가 있을 뿐 어쩌면 파커는 이를테면 '고등학생 스타크'다.
전작들과 다른 스파이더맨 슈트 또한 피터와 스타크의 밀착된 관계를 부각한다. 스타크가 직접 만들어 파커에게 선물한 슈트는 아이언맨의 그것처럼 최첨단 무기에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을 탑재한 병기로, 선배 스파이더맨들이 보여준 일종의 '코스튬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다. 아이언맨이 인공지능 자비스를 활용해 전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스파이더맨 또한 캐런과 소통하며 상대를 제압한다. 겉모습만 다를 뿐 똑같은 사실상 같은 캐릭터라고 불러도 될 이런 설정들을 시리즈의 연관성과 캐릭터의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마블이 아무렇게나 배치했을리 없다.
결국 마블은 스파이더맨이 아이언맨을 대체하는 MCU 세대교체 큰 그림을 '스파이더맨:홈 커밍'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한 편을 완성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기존 영웅에 대한 관객의 피로감도 생각해야 한다. 그 사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50대가 된지 3년이 지났고,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번스는 이 시리즈에 참여한 10년 동안 포기해야 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마블은 이들과 2020년대를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 슈퍼 히어로계에서 가장 익숙하고 화려한 영웅인 스파이더맨의 합류를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마블은 스파이더맨의 인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마블 제국의 앞으로 10년을 이끌 새 얼굴이 필요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마블은 내년 5월 개봉하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와 2019년 5월 개봉 예정인 '어벤져스' 네 번째 편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어벤져스4' 직후에 개봉하는 '스파이더맨:홈 커밍2'(2019년 7월 개봉)는 이 세대교체를 본격화하는 작품이 될 공산이 크다. 스파이더맨과 함께 '시빌 워'에서 첫 등장한 블랙 팬서는 캡틴 아메리카의 대체자로도 보이는데, 블랙 팬서는 캡틴과 전투 형태가 유사하고 캡틴이 비브라늄 소재의 방패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처럼 그 또한 비브라늄 갑옷으로 온몸을 둘렀다.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 사장이 스파이더맨을 연기할 배우로 당시 고등학생이던 톰 홀랜드를 깜짝 발탁한 것 또한 세대 교체를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물론 고등학생 설정인 스파이더맨을 위해 어린 배우를 선택한 면도 있겠지만, 스파이더맨을 더 역동적으로 연기하면서 오래 MCU를 이끌어 가기를 바라는 백년지대계에 더 가깝다. 일단 홀랜드는 합격점을 받았다. 그는 아직 다우니 주니어만큼 카리스마가 있지 않지만, 독특한 목소리와 에너지가 느껴지는 연기로 새 스파이더맨 시대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스파이더맨:홈 커밍'은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오락영화다. 모든 마블 영화를 통틀어 유머러스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코미디물이며, 이미 전작들에서도 증명된 스파이더맨 특유의 활기찬 액션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액션물이기도 하다. 다만 마블이 그려가려는 미래와 스파이더맨의 탄생을 엮어서 이 작품을 보면 더 흥미롭다. 얼마 전 울버린이 '로건'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 많은 관객이 감동한 건 그의 역사를 다양한 작품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스파이더맨은 그 첫 발을 내디뎠다.
(글) 손정빈 기자1개0개 - 3년 전
당신에게도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몬스터 콜'(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은 동화가 아니다. 12살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것, 밤 12시7분에 그를 찾아오는 나무괴물이 존재한다는 게 이 작품을 동화처럼 보이게 할 여지가 있어도 이 영화를 '동화 같다'는 식으로 표현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따위의 동화 속 가르침을 걷어차는 게 '몬스터 콜'이다. 대신 영화는 잘 살기 위해서, 잘 사는 게 벅차다면 최소한 버티기 위해서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스려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이건 교훈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다.
'몬스터 콜'을 성장영화로 분류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영화 속에서 성장은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하는 것 혹은 작은 것이라도 깨달음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할텐데, 코너 오말리(루이스 맥더겔)에게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중요한 건 '발전' 같은 게 아니다. 이 붕괴와 함께 흔들리는 삶을 지키는 것 그것 만이 지상과제다.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아니겠냐고 할지도 모르나 나이가 많다고 해서 덜 흔들리고, 어리다고 해서 더 흔들리는 건 아니다.
코너 오말리는 하루하루가 힘겹다. 사랑하는 엄마는 중병을 얻어 힘겹게 투병 중인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혼자 만의 세계에 빠져사는 코너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동급생들은 그를 어떻게든 괴롭히려 든다. 게다가 엄마의 병세가 악화해 입원하면서, 성격이 잘 맞지 않아 싫어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코너는 악몽을 꾸고 깨어난 어느 날 밤 12시7분, 정체 불명의 나무괴물을 만난다. 이 괴물은 앞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새 영화는 형식과 이야기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모범 사례로 앞으로 거듭 언급될 작품이다. 점점 지쳐 더 큰 슬픔에 젖어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현실이 아닌 환상인지도 모른다. 코너 역시 그렇다. 그가 그림을 그리며 미쳐버릴 것만 같은 이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과 나무괴물의 갑작스럽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등장은 결국 같은 말이다. 그러면서도 '몬스터 콜'은 장르영화 틀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이 판타지를 둘러싸고 있는 건 엄중한 현실이다. 환상은 오히려 현실을 더 극명하게 보여줘 어찌됐든 살아가야 하는 지독한 세상을 인정하게 한다.
이 작품은 위로의 영화이고, 위안이 되는 감격적인 108분을 선사하지만, 코너와 관객을 무작정 끌어안아 보듬어주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나무괴물은 부모도, 교사도, 멘토도, 친구도 아니다. 그는 그저 1000년 가까이 인간들을 면밀히 들여다본 냉혹한 선지지다. 나무괴물은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 뒤 "네 번째 이야기는 네가 해야 한다"고 반복 강조한다. 스스로 고백하라는 것,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 나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 나무괴물은 오히려 가혹하다. 그는 코너를 위로하기는커녕 네 번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세계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이같은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몬스터 콜'이 뜨거운 눈물을 쏟게 하는 건 게으른 긍정이나 싸구려 위로를 뛰어넘는 포용을 보여줘서다. 나무괴물은 코너를 뻔한 윤리와 도덕으로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두려워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순된 감정들을 솔직하게 꺼내놓으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잘못하는 게 아니라고, 그 죄책감까지도 안고 가야 하는 게 삶이라고 말한다. 코너가 반복해서 꾸는 악몽의 가장 두려운 부분이 비로소 드러났을 때, 그제서야 그가 다시 명백한 현실로 복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코너가 세상을 노려보며 화를 낸 이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나도 킹콩처럼 다 부숴버리고 싶다"라는 대사). 그는 먼저 자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고, 사랑하지 못했기에 다른 곳에 연신 화풀이를 해댔다. 나도 모르는 이가 세상을 알 수 있을리가 없다. 나무괴물은 "네가 나를 불러냈다"며 "네 번째 이야기를 하라"고 말하고, 코너는 "난 널 불러낸 적이 없다"며 "나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맞선다. 그러나 몬스터는 코너가 불러낸 것이었고, 그에게는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건 '몬스터 콜'을 보는 모든 관객도 마찬가지다.
(글) 손정빈 기자3개0개 - 3년 전
결국 사랑만 남았네
'마더!'(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당황스럽다. 평화를 깬 이방인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스릴러처럼 보였던 이 작품은 정상 범주를 벗어난 인물들을 차례로 등장시키고, 그들이 만들어낸 비전형적인 상황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어붙이며 충격적이고 대담하게 내달린다.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는 듯한 극도의 혼란과 당혹을 121분간 견디고 나면 다시 당황스러운 질문이 마음 속에 들어앉는다. '아, 이게 대체 다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애러노프스키의 영화는 언제나 파괴적이었다. 데뷔작인 '파이'(1998)에는 괴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후 내놓은 두 편의 걸작 '레퀴엠'(2000)과 '블랙 스완'(2010)도 다르지 않았다. 한 편은 나약한 인간에게 닥친 비극을, 또 다른 한 편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욕망의 광기를,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이미지에 담아 관객을 찍어눌렀다. 방식은 달랐지만, 그의 영화는 인간 존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같았다. '과시와 과잉'이라는 지적이 따라붙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만 그의 작품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의 방식이 인간을 가장 솔직하게 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영감이 메말라버려 고통스러워 하는 시인(하비에르 바르뎀)은 새로운 작품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한 남자를 집 안에 불러들인다. 아내(제니퍼 로런스)는 둘만의 공간에 낯선 사람을 부른 그 행동이 마뜩잖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재기를 바라며 받아들인다. 그런데 남편을 찾아온 이 남자, 수상하다. 남편과 너무 잘맞는 것도 미심쩍고, 우연히 본 그의 짐가방에 남편 사진이 있는 것도 이상하다. 의심은 점점 커지는데, 이 남자는 자신의 아내까지 집으로 끌어들인다. 여자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부부를 점점 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기색이 없다.
'마더!'에서도 애러노프스키의 방식은 다르지 않다. 그는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전복(顚覆)해 인간에 다가간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선악과, 카인과 아벨 그리고 인류 첫 번째 살인 등의 상징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모든 사건이 집에서만 벌어지고, 집 주인은 창조자 시인이며(그는 남자를 자식처럼 보살피고, 여자에게서는 관대한 분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아내가 집을 낙원(paradise)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것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애러노프스키의 야망은 인류를 2시간짜리 영화에 담아내는 것이다.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인류의 탄생과 그들이 걸어온 길을 최대한 압축해 폭발시키며 관객을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형제의 살인 이후 집에서 벌어지는 파국은 보는 것 그대로다. 집은 무질서로 가득찬다. 온갖 쾌락이 자리하고, 약탈·방화·강간·납치·테러·전쟁 등 인류가 저질렀으며 현재도 자행하는 온갖 폭력이 '지금 여기', 집 안에서 벌어진다. 종교마저 폭압으로 변질된지 오래다. 아내가 꿈꾸던 낙원은 이제 소돔과 고모라다. 한꺼번에 닥쳐 당황스러울 뿐 이 충격은 모두 인류가 행한 일들이다.
"내가 처리할게."(I got it) 아내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내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무력감에 통곡한다. 카메라는 오직 아내를 따른다. 아내를 비추거나 그의 시선만 담는다. 그러니까 관객은 오직 아내의 시각으로 모든 사태를 지켜본다. 그러니까 관객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해석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내를 인간에 의해 훼손된 대자연으로, 하나님과 예수에 가려졌던 마리아의 목소리로 봐도 무관하다. 중요한 건 아내가 남편과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건들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결정적인 목격자라는 점이다.
인간(아내)이 파국을 목도하고 고통에 몸부림 칠 때 신(남편)은 침묵한다.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잔인하지만 그게 인간이고, 이 세계의 정체가 아니냐고 말한다. 이기적인 신은 자신의 창조 행위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창조가 빚은 어떤 불행에도 책임지지 않는다(아내는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제 신은 없고 남겨진 건 오직 괴로워하는 인간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이런 난장판에는, 이런 난장판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아"라는 말로 마무리한 것으로 '마더!'를 이해할 수도 있다. 절망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용서를 이야기할 뿐이다.
이때 구약성서의 또 다른 인물 욥을 떠올릴 수 있다. 욥은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신은 최악의 고난을 선사했다. 재산을 모두 잃었고, 자식을 전부 떠나보냈고, 지독한 병을 얻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기에 욥은 울부짖는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시는 거냐고. 그러나 신은 말이 없다. 욥이 고통스러워 했던 게 이부분이다. 신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니 자신의 고통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인다는 것.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고난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게 바로 아내가 처한 상황이며, 우리가 절망을 견뎌온 과정이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사일런스'가, 이창동의 '밀양'이, 코언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모두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아내는 남편에게 아들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이 설정은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를 세상에 내려보낸 것을 상징한다). 더이상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일까. 애러노프스키는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남편은 아들을 뺏아기 위해 말한다. "난 그의 아버지야."(I'm his father)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내가 외친다. "난 그의 엄마야!"(I'm his mother!) 이 난장판 속에 그나마 남은 건 결국 사랑이다. 우리는 신을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며 의지한다. 그러나 세상을 그나마 유지하게 하는 건 아버지의 창조가 아니라 엄마(mother!)의 사랑이다. 영화가 아내의 사랑(heart)을 통해 세상을 복원하게 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글) 손정빈 기자2개0개 - 3년 전
시대와 체제를 전복하는 광기
"말은 실행의 정열에 찬바람을 몰아올 뿐이다."('맥베스' 2막 1장) 영화 '레이디 맥베스'(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는 이 말을 체현한다. 이 고요한 영화는 설명을 늘어놓기보다 보여준다. '캐서린'(플로런스 퓨) 또한 그렇다. 이를 테면 그는 왕 암살을 앞두고 고민하는 맥베스를 나약한 인간이라고 꾸짖으며 행동할 것을 충동하는 바로 그 맥베스 부인이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남편보다 먼저 움직이는 진화한 맥베스 부인이다. 캐서린의 전진 방향은 왕좌가 아닌 삶을 옭아매는 모든 걸 거부하는 철저한 반항. 이 반항을 실행하는 조용하지만 노골적이면서도 전격적인 결단, 그게 바로 캐서린이며 영화 '레이디 맥베스'다.
19세기 영국, 열일곱살 소녀 캐서린은 늙은 지주 '보리스'(크리스토퍼 페어뱅크)에게 팔려가 그의 아들 '알렉산더'(폴 힐턴)와 결혼한다. 평화롭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돈을 주고 사온 며느리이자 아내인 캐서린을 감시·감독·구속할 뿐이다. 답답한 삶에 참을 수 없는 권태를 느끼며 불만을 쌓아오던 그는 두 남자가 사업 관련 일로 집을 떠난 사이, 하인 세바스티앙을 만나 마음 속에 가둬놨던 욕망을 풀어준다. 이후 캐서린의 거침 없는 행보는 그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레이디 맥베스'는 결정됐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격렬히 맞서며 결정된 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힌다. 이건 욕망에 미쳐버린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정적 뉘앙스가 다분한 그런 시선으로는 캐서린의 행동들을 윤리적으로 단죄할 가능성이 생기며, 이 방향은 결정적으로 이 작품이 선사하는 강렬하면서도 묘한 쾌감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캐서린의 거부는 곧 결정의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다. 파국의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파국을 선택한 건 캐서린이었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안전함 속에서 분노하며 말라가던 그는 내가 결정한 불안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을 찌우는 인간이다.
캐서린은 '맥베스'의 멕베스 부인을 뛰어넘는다. 그는 저열한 방식으로 권력을 갈취한 맥베스 부부와는 다르다. 캐서린은 압제에 저항하는 인물이기에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 맥베스 부인과는 달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맥베스'가 인간 누구나 가진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낸 비극에 관한 이야기라면, '레이디 맥베스'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전위적 계급 투쟁에 관한 이야기이고, 남성 중심 권력 체제를 전복하는 여성주의를 담은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캐서린은 심지어 나약한 남자에게도 벌을 내린다).
캐서린의 섹스와 살인은 시대의 불합리와 그 시대에 종속된 인간들이 행하는 억압의 반작용으로 행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하인 애나(나오미 아키에)는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억지로 빗어 말아올리고, 코르셋으로 허리와 가슴을 강하게 조이며, 새장과 같은 크리놀린은 치마 안에 다리를 가둬 움직임을 최대한 억제한다. 이런 폭력의 반대 급부로 머리를 풀고 옷을 벗고 바로 이 잘못된 사회가 가장 금기시하는 두 가지 행동을 실천하는 건 상징적이어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것도 없이 관객에게 짜릿함을 안긴다.
이 작품의 원작인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과 '레이디 맥베스'의 가장 큰 차이는 하인 애나의 존재다. 소설 속에 없는 그는 영화에서 캐서린과 대척점에 서있다. 애나는 캐서린의 '나쁜' 행동들을 주인에게 알리는 것은 물론 주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껴 말을 잃을 정도로 양심적인 인물이다. 캐서린은 같은 여자이면서 흑인이기까지 해 최악의 조건에서 살아가는 그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건 애나가 캐서린의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존 체제에 종속돼 노예의 삶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시아버지나 남편과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완성하는 건 1996년생 배우 플로런스 퓨(Florence Pugh)다. 이 신인 배우는 카메라와 스크린을 넘어 극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놀라운 건 퓨가 어린 배우들이 흔히 보여주는 다소 과장된 감정 표현이 아닌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과 표정만으로도 캐서린이 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재능은 결코 흔하지 않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의 뛰어난 연출이 퓨를 돋보이게 하는 면도 있지만, 많은 장면에서(특히 캐서린이 쇼파에 앉아 있는 신)퓨가 올드로이드 감독의 영화를 더 빛나게 한다. 퓨는 '내 사랑'의 샐리 호킨스와 오스카를 놓고 경쟁할 자격이 있다.
(글) 손정빈 기자2개0개 - 3년 전
비극 블록버스터
'혹성탈출' 세 번째 편(감독 맷 리브스)의 부제 '종(種)의 전쟁'은 유인원과 인간이 상대 종을 절멸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을 뜻하지 않는다. 러닝타임 140분 동안 두 종족이 전투하는 장면은 10분 분량의 오프닝 시퀀스 외에 없다. 한쪽이 제거돼야 다른 한쪽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의 제로섬 게임은 애초에 없었다. 이 전쟁은 매파와 비둘기파의 의견 충돌에 이은 합의 실패가 만들어낸 것으로('반격의 서막') 사실상 위기는 안에서 촉발했고, 내분 전까지만 해도 두 종은 공존할 수 있었다. '종의 전쟁'은 곧 '종 내부의 전쟁'이다.
전쟁은 '반격의 서막'(2014)에서 시작된 상수다. '종의 전쟁'은 이 판을 흔드는, 두 종족 내에서 발생한 변수, 그리고 대처와 극복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순간에도 이성을 놓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던 '시저'(앤디 서키스)는 가족을 잃고 복수에 골몰한다. 유인원들은 그 사이 절대적 지도자를 잃고 광야에 내던져진다. 시미언플루 확산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인간은 이제 바이러스 부작용으로 지적 능력마저 퇴화한다. 최악의 위기, 이 재앙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퇴보하는 동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고뇌·결단·후회·반성은 '혹성탈출' 3부작을 관통한다. '진화의 시작'(2011)이 전복과 해방을 다룬 작품이고, '반격의 서막'(2014)이 새 체제 유지에 관한 이야기이라면, '종의 전쟁'은 생존과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을 그린다. 그때마다 이 시리즈가 집중적으로 담은 건 고민에 빠진 시저의 얼굴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 "No"라는 것(진화의 시작),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Home, family, future"(반격의 서막), 동족을 다시 규합하는 "Apes together strong"이라는 외침은 모두 시저의 고뇌·결단·후회·반성 속에서 터져나왔다.
'혹성탈출'은 단순히 블록버스터라는 말로 한정할 수 없다. 이건 '비극 블록버스터'다. 시저는 자신이 원치 않은 능력을 가진 탓에 영웅이 될 운명에 놓였고, 그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새 시대·새 문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짐을 짊어지고 나아가지만, 세계는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지 않기에 괴로웠다. 그는 그 뛰어난 능력때문에 가족을 잃고 복수라는 욕망에 휩싸이지만, 그 욕망마저 누르고 자신의 운명을 또 한 번 받아들이고 전진한다. 어떤 블록버스터도 이런 비극적 영웅 이야기를 시도한 적이 없다.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 뛰어난 컴퓨터그래픽(CG), 더 장엄한 그림들이 담기는 건 기술의 진보나 제작비의 규모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자신이 내건 최고의 가치('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와 대원칙('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을 모두 어긴 영웅의 몰락과 반성, 최악을 향해 가는 인간 행태에 대한 연민과 두려움, 종족의 미래에 관한 공포를 시저의 눈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정교한 CG 연출이 필요했다. 유인원의 진화에서 그치지 않고 헤게모니가 완전히 교체되는 거대한 혁명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시각적으로도 관객을 압도하는 광경들이 그려져야 했음은 물론이다.
디스토피아를 담은 많은 작품이 그러했듯이 '혹성탈출' 역시 세계의 미래를 고민한다. 이를테면 공동체가 완전히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해나가느냐는 것이다. 이 고비의 정점에 유인원 공동체의 뿌리인 시저의 부재가, 인간 문명을 가능케 한 모든 것인 지능의 퇴화가 있다. 두 종족은 다른 길을 간다. 유인원은 희생과 협력으로 승리하고, 인간은 결국 인간다움을 포기하면서 자멸한다. 유인원이 인간에게서 탈출한 직후 벌어진 인간들 사이의 전쟁을 거대한 눈사태로 휩쓸어버리는 건 이런 종족에게서는 더이상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다는 의미로 봐야한다.
이런 측면에서 '종의 전쟁'은 앞서 개봉한 '덩케르크'와 상통한다. '덩케르크'는 공동체가 어떻게 작은 희망을 지켜나가는지 보여줬다. '종의 전쟁'도 그렇다. 시저라는 유일무이한 영웅이 있지만, 유인원 공동체를 구한 건 결국 시저를 포함한 그들 모두였다. 관객은 인간이 아닌 유인원들의 승리를 바라면서 영화를 따라가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이 인간성을 놔버릴 때("인류를 구하기 위해선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라는 대령의 대사) 유인원들은 인간만이 가진 숭고한 가치를 지켜나가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대령은, '우리가 싸우고 저항하는 과정은 그 싸움과 저항을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나오미 울프)라는 걸 알려주는 캐릭터다. 유인원들이 퇴화한 지능의 인간 소녀 '노바'와 교감하는 것과 다르게 인간은 퇴화한 동족을 제거한다. 노바가 유인원 탈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상징적이다. 대령이 시저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자신에게 생겨 죽게되고, 시저가 그를 연민하게 하는 건 세계를 향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이기도 하다.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이 1968년에 내놓은 '혹성탈출'을 통해 '종의 전쟁' 이후의 이야기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세상은 시저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유인원과 인간은 공존하지 못했고, 인간은 유인원의 노예가 됐다. 이건 유인원을 완전히 제거하려던 인간의 방식이며, 코바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낸 인간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이제 유인원의 미래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샤프너 감독의 '혹성탈출'은 이번 세 편의 리부트 시리즈를 통해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혹성탈출'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이다.
(글) 손정빈 기자1개0개 - 3년 전
귀한 시도...아름다운 반 고흐
이를 테면 이런 시도가 아닐까. 잉마르 베리만의 삶을 잉마르 베리만 스타일로 영화화하는 것이거나 히치콕이 걸어온 길을 히치콕의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 영화 '러빙 빈센트'(감독 도로타 코비엘라·휴 웰치먼)가 그렇다.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상업적 설명보다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빈센트 반 고흐의 방식으로 그려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짧은 시간 거대한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진 어느 화가의 삶이 그가 보여줬던 거칠면서도 섬세한 붓터치로 되살아날 때 우리는 그 순간 무엇을 볼 수 있을까.
1891년, 빈센트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흘렀다. 빈센트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 사이에 오가던 편지를 배달하던 우체부 조셉 룰랭은 빈센트가 남긴 마지막 편지가 배달 불가로 반송되자 그의 아들 아르망을 시켜 테오에게 직접 전달케 한다. 하지만 테오도 이미 숨을 거둔 뒤다. 아르망은 테오를 만나러 간 곳에서 형제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빈센트의 마지막 작업 장소이자 그가 숨을 거둔 곳인 오베르로 향한다. 아르망은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빈센트가 죽은 이유를 추적해 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영화 '러빙 빈센트'는 꼭 봐야할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기획부터 완성까지 10년이 걸렸다는 건 그리 특별하지도 않다. 유화 작업을 위해 4000명의 화가를 오디션해 107명을 선발, 이들이 2년 동안 6만2450점의 유화 그림을 직접 그려 완성한 게 바로 이 영화다. 고흐의 걸작 '별이 빛나는 밤' '즈아브 병사의 반신상' '아를의 노란 집'으로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를 만드는 데만 1년이 걸렸고, 작품 내에는 고흐의 명화 130점이 다시 그려져 담겼다. 고흐를 향한 경외와 사랑, 정성이 가득 담긴 작품이기에 그의 그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러닝타임 95분은 내내 황홀할 수 있다.
이런 시도는 관객이 고흐의 세계로 직행할 수 있게 한다. '러빙 빈센트'는 고흐의 생애 전체를 설명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다. 도로타 코비엘라·휴 웰치먼 감독은 그 어떤 설명도 그의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 너머를 보여줄 수 없다고 믿는 듯하다. 간편하게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고흐의 그림에 취해 따라가다가 관객 각자가 생각하는 고흐를 보게 되면 그만이다(영화가 가로 67㎝ 세로 49㎝ 캔버스와 같은 비율로 제작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메시지도, 결론도 중요하지 않다. 매순간 힘겨웠지만, 누구보다 뜨겁게 살다간 한 인간을 제목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영화는 일종의 수사물이다. 자살하기 위해 총을 쐈다지만, 머리가 아닌 복부에 상처를 입은 게 의심스럽고, 더군다나 총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르망은 오베르에서 고흐를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가며 진실에 접근해간다. 평범한 방식인데다가 정교한 구조를 갖췄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고흐에 관한 또 다른 시각의 정보를 차례로 제공하며 러닝타임 내내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연출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즐길 수 있다.
중요한 건 역시 고흐의 죽음에 얽힌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고흐라는 사람의 실체다. '러빙 빈센트'의 고흐는 위대한 예술가도, 자신의 귀를 자른 광인(狂人)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린 환자도 아니다. 그는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이 세계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바로 그 시선이 "빈센트는 무너졌던 거야. 누구든 그럴 수 있다. 삶은 강한 사람도 무너뜨리곤 해"라고 말하는 조셉의 대사에, "빈센트는 캔버스마다 빛나는 별을 그렸어. 하지만 그 별들은 깊고 텅 빈 외로움에 둘러싸여 있었지. 그는 미래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어"라는 토로에 담겨있다.
'고흐는 28살이 돼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0년 간 작품 활동을 하고 37살에 세상을 떠났으며, 생전에 딱 한 점의 그림을 팔았다. 지독하게 가난했고, 늘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아는 고흐의 삶이다. 하지만 화구상 탕기 영감은 이렇게 말한다. "난 생각했어. 그의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나겠구나. 마침내 별이 떠오르고, 그가 선택한 길이 맞았다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돈 맥클린이 고흐에게 바친 노래 '스태리 나이트'(Starry Night)가 흐른다.
(글) 손정빈 기자1개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