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익님이 쓴 리뷰
- 13시간 전모두를 죄인이자 피해자로 만드는 그럼에도 쉽게 놓을 수 없는 불가항력에 대하여
대중 매체에서 치매를 조명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이 사람을, 주변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너무 잔인해 외면하고 싶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 이전의 삶과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꾸준히 나오는 것 같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챘겠지만 <더 파더> 역시 치매에 걸린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아무르>를 비롯, 예술 영화에서도 치매를 여러 차례 다뤄와서 소재 자체로는 특별한 부분이 없지만(심지어 거주 공간에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특히 <아무르>를 닮아 있다.) <더 파더>는 치매를 더욱 가슴에 와닿게 묘사해낸다. 그 상황을 체험을 시키고자 하는 것이 의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더 파더>는 섬세한 묘사로 당사자가, 그 주변인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를 그려낸다.
영화의 대부분은 치매에 걸린 앤소니[앤소니 홉킨스 분]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영화는 이 시점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영화의 오프닝, 딸 앤[올리비아 콜먼 분]과의 대화에서 앤이 프랑스로 가서 살고자 한다는 정보를 주고 다음 장면에서는 앤의 남편 폴[루퍼스 스웰 분]이 등장하고 앤소니는 폴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까지 공개된 정보의 진위 여부를 바꿔가면서 혼란을 준다. 이후 대화에서 앤은 프랑스로 가지 않는다고 기존 발언을 번복하는가 하면, 앤소니가 봤던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가 앤의 남편인 폴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이 정보들의 진위 여부는 공개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이 주는 혼란함, 특히 유독 거대한 집에서 앤소니를 작게 잡아내는 영화의 앵글은 앤소니가 겪는 상황의 혼란을 고스란히 체험시켜준다. 다른 영화들처럼, <더 파더>는 시계나 둘째 딸에 대한 에피소드, 기존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잘한 상황들 등 치매에 걸린 인물을 표현하는 영화 내 요소들이 많지만 이를 앤소니의 시점으로 체험시켜준다는 점에서 확실한 차별점을 가진다. 그리고 이 체험이 있기에 영화 후반부, 오열하는 폴의 모습에서 이 질병이 어떻게 사람을 무너뜨리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이 영화가 가치 있는 이유는 치매의 1인칭 체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돌이켜 보면 영화의 가장 첫 장면, 앤소니와 앤의 기나긴 대화로 이루어진 오프닝 씬 이전의 첫 장면은 바로 앤이 길거리에서부터 아파트에 들어오기까지, 분명 앤의 시점이라고 봐야 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영화는 앤소니 시점이 아닌 장면들은 앤의 시점을 주로 활용하여 그 주변인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를 상세하게 그려낸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식탁에서 앤과 폴이 싸우는 장면이다. 대화를 나누던 앤과 폴은 앤소니가 식당에 등장하자 대화를 멈추고 앤은 황급히 앤소니를 챙긴다. 이후 마실 거리를 찾아 앤소니가 떠나자 다시 앤과 폴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작은 싸움으로 번지던 찰나, 앤소니가 처음과 같이 등장하자 앤은 다시 앤소니를 황급히 챙긴다. 이 장면 하나에서 간병인의 딜레마, 자신의 삶과 간병 사이에서의 선택을 보여줌과 동시에 치매의 특성상 같은 상황을 수차례 반복해야 한다는 그 고통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스크린에 투영된 순간으로 바라보지만 간병 상황 자체가 기약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너무나도 잘 드러낸다. 그렇기에 앤이 잠들기 직전, 침대에서 폴을 바라보며 내리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발언을 자제하게 되는)어떤 결정에 대해 영화 초반부에서는 매정하다고 생각되다가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환자와 간병인, 양쪽의 체험을 극대화하게 만드는 요인은 이를 그려내고 바라보는 방식이 탁월하기 때문도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갈등의 두 축을 이루는 앤소니와 앤을 연기한 앤소니 홉킨스, 그리고 올리비아 콜먼은 괜히 아카데미 수상자가 아니구나 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그중에서도 앤소니 홉킨스가 선보이는 연기는 아주 놀랍다. 정정한 노인으로서의 모습부터 반복되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분노와 혼란, 그리고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한 인간의 모습까지, 인물이 표현해야 하는 넓은 스펙트럼의 모습과 그 감정들을 아주 잘 표현해내고 있다. <더 파더>는 주요 상황들이 인물들의 거주지인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영화의 대부분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기에 배우의 연기에 따라 영화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더 파더>는 연출과 촬영으로 정갈하게 깔아둔 판에 배우들이 날개를 달아주는 격으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훨씬 강렬하게 전달해내고 있다.
사실 이 영화, 국내 공개 전부터(국내 정식 개봉은 3월, 현재는 CGV의 골든글로브 기획전을 통해 공개되었다.) 앤소니 홉킨스의 연기로 떠들썩했던 작품이다. 아카데미 레이스에서 각 작품들의 추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남우주연상 부문은 앤소니 홉킨스가 유력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돌면서 말이다. 그 부분에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앤소니 홉킨스가 받았으면 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지 연기로만 집중 받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겠지만 <더 파더>는 치매를 표현하는 데 있어 아주 고심한 티가 역력한 작품이고 그 결과 역시 참신하고 출중한 작품이다.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연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자체가 가지는 의미로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영화였다.
p.s. 감독을 맡은 플로리안 젤러는 이 작품이 연출 데뷔작이다. 벌써부터 다음이 기대되는 감독이다.0개0개 - 10일 전때려 부수는 것도 맥락 없이 두 시간 내내 반복되면 피곤하지
지금까지 게임 원작의 영화는 성적과 평가 양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스토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한들 장시간 체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게임을 두 시간 내외의 서사 매체인 영화로 각색, 연출하는 것이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폴 W.S. 앤더슨 감독은 이러한 게임의 영화화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둔 감독이다. 폴 W.S. 앤더슨 감독은 게임의 기본적인 컨셉만을 가져오고 오락성을 중심으로 새로이 각색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로 평단의 외면을 받았고 대박의 흥행은 터뜨리지 못했지만 꾸준하게 관객몰이를 하며 시리즈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번 <몬스터 헌터>도 액션을 중심으로 각색을 한 티가 예고편부터 강하게 났다. 생각 없이 즐기기 좋은 영화인 줄 알았고 실제로도 이러한 부류의 영화였으나 <몬스터 헌터>는 그 정도가 피로할 정도까지 간 경우라고 느껴졌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가벼운 액션 씬을 제공하고 주인공 아르테미스 대위[밀라 요보비치 분]와 그 일행을 새로운 세계로 몰아넣어 끊임없이 추격과 전투를 이어나간다.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잔해가 사건을 암시하고, 힘을 앞세운 디아블로스가 주는 묵직함과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공격하는 네르스큐라가 주는 공포 영화와 같은 긴장감을 전달한다. 이후 동료가 되는 헌터[토니 쟈 분]와의 갈등까지. 영화는 시작 후 꽤나 긴 시간을 마치 하나의 시퀀스처럼 긴장감을 쭉 이어나간다. 액션 시퀀스 자체의 완성도도 아주 뛰어나다고 보긴 어려워도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고 전반적인 리듬 자체가 주는 쾌감도 나쁘지 않았다. 영화 관람 전 예상한, 생각 없이 즐기기 좋은 영화의 컨셉을 잘 구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다음부터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전 정보 없이 몰아치는 시퀀스들이 끝나고 환기하는 과정에서 이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몬스터 헌터>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다. 아르테미스와 헌터가 각기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로 지금까지의 액션으로 몰아친 데서 온 긴장감을 이완시키며 완급조절을 하지만 반대로 최소한의 설명이 과하게 차단되는 느낌이 강하다. 이후 제독[론 펄먼 분]의 등장으로 설명이 이뤄지긴 하지만 역시 그리 큰 진전은 없다. 그 사이사이와 그다음은 역시나 액션으로 채워진다.
그러니까 <몬스터 헌터>는 서사의 진행 없이 물리적 충돌만 남는 느낌이 있다. 액션 영화에서 서사가 무슨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존 윅>을 예시로 들면 이해가 쉽다. 존 윅[키아누 리브스 분]은 자택에 침입한 암살자들을 처리하고 이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클럽, 호텔, 시내 등 그 과정에 따라 인물을 찾아 나선다. 단순한 서사고 그 안은 액션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안에는 최소한의 세계관(킬러들의 세계 등)이 설명되고 목적을 쫓아가는 과정이 분명하게 그려진다. <몬스터 헌터>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큰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이 세계를 탐험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지만 그 과정이 최소한의 서사를 구성할 만큼 드러나지는 않아 보인다. 2시간 동안 최소한의 서사마저 배제하고 액션으로 가득 채운만큼 영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피로감이 느껴지는 편이다. 하물며 앞서 언급했듯 액션의 질 자체도 아주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려워 피로감은 더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는 액션 영화들은 뛰어난 액션 연출로 우선 찬사를 받는다. 앞서 예시를 든 <존 윅> 시리즈, 동남아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와 모두를 놀라게 한 <레이드> 시리즈 등. 이들은 모두 기존과 차별화된 액션으로 관객들은 물론 평단까지 열광시켰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두 시리즈 모두 액션을 전달하기까지에 있어 훌륭하게 완급조절을 하고 있고 액션에 몰입할 수 있는 배경을 깔아둔 뒤 액션을 진행한다. 한 영화는 자신의 애완견이 죽어 관련된 모두를 죽이는 복수극에서 시작했고 다른 한쪽은 범죄자를 소탕하러 들어간 건물에 갇혀 사투를 벌이는, 아주 간단한 서사를 전달하는 영화임에도 말이다. <몬스터 헌터>는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서사적으로 덜어낸 부분들이 구멍이 된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리 액션이 주는 쾌감이 좋다 하더라도 맥락 없이 두 시간 내내 때리고 부수기만 하면 그 피로함 역시 커지는 법이니까.0개0개 - 10일 전그 마음만은 같은, 어쨌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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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아카데미 기획전에서 상영할 당시 '곧 개봉하겠지 뭐'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고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 그렇게 본의 아닌 기다림 끝에 관람한 <페어웰>은 평범해서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가족에 대한 감정을 다루고 있어 특별히 신선함은 없었지만 그 감정에 대해 아주 신중하게 접근한다. 차근차근 쌓아올려 전달해낸 감정, 그리고 결론만으로도 <페어웰>은 충분한 가치를 발휘하는 영화다.
영화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할머니[자오 슈젠 분]를 속이고 할머니에게 행복한 기억을 만들고자 미국에 살고 있는 빌리[아콰피나 분]를 비롯, 대가족 전부가 한 데 모여 가짜 결혼식을 펼치는 영화다. 영화는 결혼식 준비 과정을 비롯해 가족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주된 딜레마는 거짓말에 기대어 한다. 가족이라면 알려주어야 한다는 빌리와 행복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알리지 말아야 한다는 다른 가족 사이의 의견 차이를 영화는 주된 주제로 나아간다. 이를 비롯해 가족 구성원들끼리도 각자 갈등을 빚는 지점을 만들어 앙금을 하나둘씩 드러낸다. 같은 목적을 위해 모였지만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이 조금씩 터져 나온다. 영화는 이러한 양상을 가족들과 가장 동떨어져 있는 빌리의 시선으로 다룬다.
빌리는 가족들에게 아픈 손가락과도 같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으로 가 가족들과 별다른 교류조차 하지 못해 다른 가족들과 데면데면하고 중국의 문화나 관습을 이해하지 못해 부모님과도 갈등을 빚곤 한다. 더불어 감정에 솔직한 편이라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중국으로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영화는 이러한 빌리를 설득해 나가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알리지 않는 게 전통이라는 가족들의 말에 반기를 들고 자신과 비슷한 정체성인 젊은 의사와 영어로 이 대화를 이어나가지만 역시 전통에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영화는 이 가치관의 차이를 넘어 빌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빌리에 대한 설득은 곧 가족에 대한 보편적인 마음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과정을 영화는 담담한 카메라로 포착하려 한다. 영화가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은 기억의 한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말미, 결혼식장에서 재미있게 놀이를 하며 술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 특히 반대하던 빌리마저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이 잡히고 이전 할머니 집을 떠올리며(심지어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음에도)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영화의 초반부터 이어지는 새들의 등장 역시 가족에 대한 기억, 나도 모르게 왔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특히 어린 시절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할머니를 떠났던 빌리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 기억들은 영화의 슬픈 감정과 딜레마의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근거가 된다. 결국 영화의 결말에서 빌리가 힘찬 기합과 함께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 기억은 이 기억에 잠식되는 것이 아닌 추억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돌아가시지도 않는 할머니를 두고 영화가 <페어웰>, 그러니까 작별을 제목으로 둔 이유도 그 기억을 간직하며 떠나보낼 것을 잘 떠나보낸 빌리의 모습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빌리는 중국을 떠나며 할머니를 바라보고 할머니의 옛집을 지나가며 이 사람에 대한 기억을 한껏 품는다. 그리고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힘찬 기합을 내지른다. 감정에 잠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좋은 감정만을 남긴 채 잘 떠나보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이야기가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관계를 세세하게 분해하는 룰루 왕 감독의 세심한 연출도, 빌리를 연기한 아콰피나의 뛰어난 감정 연기도 있겠지만 결국 가족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아주 일상적이고 그럴듯한,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영화는 이를 가족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으로 설득해 내려간다. 그렇기 때문에 <페어웰>은 어디선가 본듯한 가족 영화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아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줌에도 영화가 전달하는 것에서 큰 힘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0개0개 - 10일 전극장판이 가지는 한계에도 그 화려함만큼은
원래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은 잘 보지 않는 편이다. 대부분이 그 시리즈를 보았다는 전제하에 제작되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아 작품을 재미있게 즐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하 <귀멸의 칼날>)을 극장에서 관람한 이유는 일본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본이 만화와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키고 있던 일본 역대 박스오피스 1위 기록을 갈아치워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코로나 시국에. 작년 여름부터 흥미를 가졌고 국내에 개봉을 하면 관람을 해야겠다 생각했고 개봉 3주차를 맞이한 2월 10일, IMAX로 관람했다. 결과는 어쩌면 예상대로였다. 짐작하던 한계와 장점 양쪽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귀멸의 칼날>은 극장판 타이틀이 붙은 다른 영화들과 서사적, 연출적 측면에서 큰 차별점을 가지지 못한다. 캐릭터가 단순한 편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설명은 거의 없고 기존 세계관을 알아야만 따라갈 수 있는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서사와는 별개로 그림체가 바뀌며 코미디를 유도하거나 장황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대사, 과장된 감정과 행동 등 일본 만화의 특징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만화를 좋아했고 과장된 행동과 장황한 설명이 가득한 [헌터X헌터]를 가장 좋아했기에 익숙하다 생각했지만 큰 스크린에서 보는 이러한 요인들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을 즐겼거나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겠지만 일반 관객들에게 넓게 통용될까는 사실 의문인 작품이다.
하지만 상기한 부분은 이야기로서의 측면이고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미 TV 방영 당시부터 이 시리즈의 화려한 액션은 상당히 유명했으며 인터넷에는 클립이 다수 나돌기도 했다. 극장판인 <귀멸의 칼날>은 큰 화면에서 이 장점을 확실하게 발휘한다. 2D와 3D 작화를 적절하게 섞고 각 캐릭터들의 능력을 화려하게 시각화하여 보는 맛을 제대로 살려내었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후반부, 렌고쿠[히노 사토시 분]와 아카자[이시다 아키라 분]의 대결 장면은 그 화려함이 큰 힘을 발휘한다. <귀멸의 칼날>은 지금까지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는 역동성을 구현해놓아 보는 맛을 확실하게 보장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아무에게나 쉽게 쉽게 권하지는 못하겠다. 일본 애니메이션 자체가 어느 정도 갈라파고스화 된 느낌도 있고 <귀멸의 칼날>이 다루는 이야기가 TV 애니메이션 방영분 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몰입이 쉽지 않은 편이다.(물론 이러한 측면 때문에 기존 팬들에게는 아마 필관 해야 할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부분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아마 오래 갈 것 같다.0개0개 - 19일 전기대 이상의 장점, 우려했던 그대로의 단점
못해도 작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핫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단편 <남매의 집>, <늑대소년>로 흥행과 평단의 주목을 모두 받은 조성희 감독의 신작인데다 한국 최초로 스페이스 오페라에 도전한 패기에 제작 단계부터 큰 화제가 되었고, 코로나 시국에 개봉을 하냐마냐로 또 여러 차례 이슈를 몰고 다니다 200억 대 제작비의 초 대규모 영화가 최초로 OTT 공개를 선택해 또다시 이슈가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에 대한 기대와 우려, 그리고 영화 외적인 이슈까지 주목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마주한 <승리호>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은데?'였다. 분명 우려했던 단점들은 있었지만 기대 이상의 부분들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에서 초 대규모의 블록버스터가 제작될 때 관객과 평단 모두가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각본이다. 제작비가 200억을 넘어가게 되면 손익분기점이 500만을 상회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과감하게 구성하기보단 안전한 작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안전한 작법이 꼭 각본이 꼭 영화의 단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인 <스타 트렉>의 리부트 시리즈만 봐도 예상 가능한 분위기와 각본 속에서도 충분히 재미있고 잘 만든 영화가 탄생할 수 있다. 다만 각본의 부족한 개연성이나 인과관계가 드러날 경우 단점이 훨씬 부각되곤 한다. <승리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문제는 중후반부로 갈수록 나타난다. 초반부야 만화 같은 경쾌한 분위기, VFX를 앞세운 볼거리로 각본의 문제가 그리 드러나지는 않지만 인물의 과거사가 나오면서,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서는 순간에서 영화의 이야기가 아쉬운 부분을 드러낸다.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야기를 해보자. 태호의 과거를 설명하면서 꽃님/도로시[박예린 분]와의 교감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확보해뒀지만 영화 스스로 이미 한 번 회상한 장면(도박장)의 뒷부분을 덧붙여 보여줄 정도로 설명을 더하고 있다. 물론 영화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장면이고 주인공이 선택을 하는 순간이기에 구조적으로는 맞지만 해당 장면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영화의 주된 갈등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검은 여우단과 기업의 관계 역시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만 비교적 얕고 쉽게 등장하는 느낌이 강하다. 더불어 영화 후반부, 클라이막스를 담당하는 시퀀스에서 주인공들이 한 선택,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과정들이 약간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는 적지 못하겠지만 주인공들이 겪는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이 비교적 편의를 앞세운 느낌(나노봇)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 직전 다졌던 주인공들의 각오와 매치되지는 않는다.
물론 위 요인들에 대해 이러한 생각은 한다. 주인공의 선택에 대해 설명이 필요했기에 이야기의 구조상 어색하지 않고 밝은 분위기의 블록버스터이기에 이러한 선택이 구조상 필요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구조에 맞춰 필요한 것들을 채워는 놓았지만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고 자연스럽게 관객을 설득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러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 영화,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각본 상에서 단점이 느껴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익숙한 구조에 충실해 따라가기 편안한 형태였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볼거리들에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에서 <승리호>는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단지 어색하지 않은 VFX가 아닌 정말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을 수준의 시각 효과를 영화 내내 선보인다. 영화의 오프닝, 물품 보관소를 지나 보여주는 미래의 서울, 우주로 나아가는 엘리베이터가 주는 첫인상은 '괜찮은데?'하는 부분이 있었으며 그 이후 본격적으로 우주로 나가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 초반의 쓰레기 탈취 장면이나 이후 벌어지는 총격전, 비행 시퀀스 등이 선사하는 볼거리는 인상적이었다.
이와 연계해 액션 시퀀스의 연출도 시원시원하고 그 느낌을 잘 살렸다. 초반 쓰레기 탈취 장면부터 클럽에서의 짤막한 총격전, 중반부 공장에서의 탈출, 마지막 클라이막스까지. 전반적으로 비행 장면들은 활공감이나 속도감을 잘 살렸고 복잡한 주변 공간이 주는 느낌까지도 잘 활용하고 있다. 전반적인 총격 자체는 묵직한 음향 효과와 더불어 둔탁한 타격감을 잘 전달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서도 다른 영화의 익숙한 장면이 생각나는 것은 사실이다.(클라이막스에서 청소부들이 집결하는 장면 등) 하지만 전반적인 액션 시퀀스의 구현이 잘 되어 있어 장르적인 재미를 확보해 주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승리호>는 웰메이드 SF 영화는 아니지만 오락적인 재미를 충분히 보장해 주고 있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안전하게 기획된 만큼 이 장르에서의 고점을 기대하는 마니아층을 만족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봐도 무방하고 안전한 기획의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승리호>가 주는 인상은 아쉬움뿐만은 아니었다. 한국 영화 치고'라는 타이틀을 빼고 봐도 준수한 기술적 성취와 이를 잘 활용한 시퀀스들이 주는 오락적인 재미는 확실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성취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성취가 아예 없지는 않았던, 그래도 괜찮았던 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0개0개 - 2달 전너무나 당연한 깨달음을 그 바닥부터 설득하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거대한 서사보다는 일상적인 사건들을 나열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사실적이고 담담한 연출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작품, <소년 아메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 살인을 저지를 뻔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다룬다고 했을 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금 사회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는 IS로 대표되어 꽤나 큰 사회적 문제로 거론되고 있으니까. 막상 영화를 보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고 오히려 일상적으로 파고들어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의미에서 이를 다루지 않고 개인의 단위에서 아주 당연한 이야기로서 이 문제에 대해 설득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감독의 성향에만 얽매여 어색하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다르덴 형제는 이 문제를 엄연히 '사람'의 문제로 볼 수 있도록 인도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주제인 만큼, 종교 단체와 주인공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 분]의 관계를 다루긴 하지만 이는 영화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한다. 극단적인 믿음으로 살인을 저지르려 하고 그 믿음에는 당연히 종교를 공유하는 단체와 연관이 되어 있지만 영화는 단체의 일원으로서의 아메드가 아닌 개인 아메드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이 부분에서 다르덴 형제는 본인들의 성향답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선생님, 부모, 형제와 믿음이 충돌할 때 날이 선 반응으로 캐릭터를 묘사하고 그것이 어떻게 균열을 만들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차례 극단적인 선택 이후, 소년원에서의 생활을 그리는 과정에서도 이는 극명하게 드러나며 아메드의 믿음이 가져오는 갈등과 아메드가 가져가려는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보여준다.
종교를 선택하는 등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아메드의 믿음은 갈등을 부르고 있고 이 부분을 설득하는 방식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로 회귀한다. 영화에서 자신의 믿음만을 강조하던 아메드에게 영화 중반부,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의식을 드러낸다. 비록 본인의 의지는 아니지만 자신이 죽이려던 선생 이네스[메리엄 아카디우 분]를 만나려고 했을 때 상담사에게 "이네스 선생님도 자신을 만나길 원한다"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상담사는 처음으로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천천히 쌓아올려가며 보여주기만 하던 영화의 목적이 여기서 처음으로 드러난 셈이다.
이후 농장의 루이즈[빅토리아 블럭 분]와의 잠깐의 로맨스와 갈등, 그리고 이후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인물을 납득시키는 방법으로 아메드를 피해자와 유사한 위치에 놓이도록 한다. 사역에서 소년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탈출하여 이네즈를 죽이기 위해 돌봄 교실을 찾아간 아메드는 낙상으로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네즈가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아메드 역시 느꼈을 것이고 무기로 사용하려 했던 말뚝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 바뀌게 된다. 마침내 영화가 목표한 이미지, 주인공이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경지를 마찬가지로 극단에서 이루어낸 순간이다.
영화를 다 보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나쁜 것이고 이를 극단적인 소년 아메드의 모습으로 설명하는 것이 영화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한 인물의 일상으로 파고들어 마치 천천히 포복하듯 다가가 이를 마침내 설득해냈다.
앞서 언급했듯 IS로 대표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과 테러는 특수하고 사회 문제의 맥락으로서 읽히는 텍스처이다. 종교적, 사회적 맥락을 포함하여 주로 읽히는 이 문제를 다르덴 형제는 <소년 아메드>를 통해 종교를 넘어 사람 대 사람의 이야기로 귀결시키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마지막, 풀밭에 누워있는 아메드의 거칠고 여린 이미지는 어린 소년에게 부여하기에는 가혹한 이미지처럼 느껴지면서도 다음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말의 희망을 남겨놓은 영화라고도 생각된다. <자전거 탄 소년>, <내일을 위한 시간>, <언노운 걸> 등 근 10년간의 필모를 봤을 때 느껴지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영화였다.0개0개 - 2달 전능청스럽고 잔인하고 씁쓸한 죄악의 코미디
일단 이 영화를 얘기하는 데 있어서 '새롭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연출을 맡은 홍의정 감독부터 이 영화로 데뷔하는 신인 감독이고 여러 방면으로 다뤄진 유괴를 주 소재로 삼으면서도 독특한 구성과 리듬으로 예상을 빗나가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무엇보다 이러한 '다름'이 다름을 위한 다름이 아닌, 그 안에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채워 담아 넣으면서도 색다른 분위기를 잘 조성해냈다. 만든 이들의 역량이 한껏 드러난 이 영화가 상업 영화라는 점, 그리고 어려운 코로나 시국에서 개봉했다는 점에서 아주 반가운 작품이었다. 비록 그 독특한 분위기가 대중적으로 호불호는 가를 수 있지만 <소리도 없이>는 분명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들 중 꼭 기억해야 할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 영화의 리듬이다. 잔혹한 폭력이 대동되는 범죄극이지만 영화는 영화 속 모든 인물들에게 일반인과 같은 캐릭터라이징으로 접근한다. 영화 속 창복[유재명 분]의 대사처럼, 각자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단지 그 일이 범죄일 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범죄)과 그것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일상) 사이에 묘한 괴리감이 생기고 이 괴리감이 영화의 독특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거기에 농촌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유의 느긋함과 인물들의 모습들을 겹치니 이 영화는 씁쓸하면서도 웃긴, 블랙코미디로서의 색깔을 확실하게 가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예고편에도 나온, 초희[문승아 분]가 납치되어 가는 봉고차에 태인[유아인 분]이 매달려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그러한데, 자신이 정을 준 아이가 팔려가고 이를 막아야 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심각한 장면이지만 음악과 느릿느릿 한 봉고차의 움직임, 그리고 운전자와 태인의 행동이 묘하게 웃긴 리듬을 형성해낸다.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이야기로 나아갈 수도 있는 이야기로 태인과 초희가 교감하는 장면이 상당히 많지만 영화는 그 흐름에 대해서도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잘 이어나간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는 적을 수 없지만 교감하는 방향에 대해서도 '뜨악!'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그 교감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결말에서도 역시 일종의 해피엔딩처럼 흘러가지만 그 흐름을 보기 좋게 깨고 결국 악행은 악행이라는 단호한 태도로 마무리해낸다. 단순히 연출적인 기조뿐만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에서도 태도가 분명하며 관객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어나가려는 노력이 보이는 영화였다.
잘 깔린 판에서 잘 놀아주는 배우들 역시 빛이 나는 작품이다. 유아인은 대사 없이 유괴된 아이와 교감하며 많은 변화를 겪는 태인을 몸짓과 표정으로 잘 소화해냈으며 유재명은 앞서 설명한, 범죄의 일상화하는 리듬을 가장 잘 조성해낸 배우였다. 이 두 주연배우가 '역시' 하는 연기력이었다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의외의 연기를 선보인 것은 초희 역할의 아역 문승아다. 블랙코미디의 웃기지만 씁쓸한 부분을 넘어서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의 리듬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유괴된 아이, 초희에 의해서다. 역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는 못 적겠지만, 영화 후반부, 상황이 펼쳐졌을 때 보이는 초희의 표정 변화나 행동 등에 의해 영화는 어떤 충격 혹은 당혹감을 전달하는데, 꽤나 복합적일 수 있는 이 느낌을 문승아는 너무나도 잘 소화해내고 있다. 마치 이 영화의 화룡점정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영화의 후반부, 특히 결말이 주는 당혹감이나 충격, 그리고 의외의 리듬으로 나아가는 이 영화의 방향이 상업 영화로서 대중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는 대목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요인들이 이 영화를 올해 개봉한 한국 상업 영화 중 가장 개성 있는 영화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무엇보다 색깔 강한 영화가 신인 감독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이, 그리고 상업 영화로서 기획되어 완성되었다는 것이 이 영화를 한 층 더 의미 있게 만들지 않나 생각한다.0개0개 - 2달 전들쭉날쭉하게 나아가지만 결국은 올곧게 마무리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처음 봤을 때는 올 초 국내에 개봉한 <다크 워터스>가 떠올랐다. 대기업의 횡포를 주제로 실화를 모티프 삼았으며 이를 고발하는 주인공은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인 기업을 상대한다는 구도, 심지어 대기업의 횡포가 마침 오염수를 방류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공통점이 아주 많은 영화다. 하지만 <다크 워터스>는 실화를 스크린에 구현해내는 데 집중한 반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상업 영화로서 재미를 위해 만화적이고 밝은 분위기를 구현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비록 그 선택이 아주 좋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고 전반적인 완성도를 따지자면 <다크 워터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그렇다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아주 나쁘다고 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잘 구현해낸 분위기 안에서 사건을 올곧게 마무리해내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초반부는 조금 들쭉날쭉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주인공 세 캐릭터의 이야기를 교차로 보여줘야 하면서 동시에 영화의 메인 주제가 되는 페놀 방류 사건 역시 소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회사의 고된 일과 불합리한 처우에 시달리지만 주인공들을 소개하는 톤은 매우 밝은 반면 본격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무겁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갈래의 이야기 모두 만화적인 톤이 지배적이기에 조금은 산만하고 다른 부서에 있는 세 캐릭터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오가며 전달되는 초중반부 이야기는 응집력에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초중반부,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보람[박혜수 분]의 캐릭터는 조금 붕 뜨는 느낌까지 들기도 한다.
이러한 들쭉날쭉함은 영화 후반부에도 이어지는 편이다. 영화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등장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회장님[박근형 분], 갑작스레 조력자로 합류하는 홍수철 과장[이성욱 분], 그들의 승리를 과하게 과장된 모습으로 보여주는 연출 등. 영화는 갈등을 현실적인 방법으로 해소하고자 했지만 이를 보여주는 방식이 그 현실성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어쨌든 이 영화가 이야기를 잘 마무리했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전히 위 문단에서 지적한 대로 들쭉날쭉한 부분은 없지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요소들이 메인 플롯으로 잘 응집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이 메인 플롯으로 겪는 주인공들의 내적 갈등과 그로 인한 각성 역시 잘 유도해냈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이 부분에는 세 배우의 연기 역시 한몫을 하고 있다.) 특히 영화 초반부, 'boys be ambitious', 유나[이솜 분]의 첫 대사 등을 생각하면 여성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이지 않을까 했던 우려를 불식시키고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이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고도 생각한다.(꽤나 노골적인 연출이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그리 만족스러운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에 단점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하필이면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가 연초에 있었고(<다크 워터스>) 그 영화를 만족스럽게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무거운 주제를 밝고 만화적인 톤 안에서 잘 마무리해냈다. 비록 그 톤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일관성을 잘 지켜내었고 더불어 이것이 상업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잘 보장해 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 때문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나쁘지 않게 보인다. 단점은 있어도 그 정체성만큼은 확실한 영화였으니까.0개0개 - 2달 전번듯한 생김새, 아쉬운 과정, 성급한 마무리
이 영화도 오래 걸렸다. 본래 6월 개봉을 예정했던 <도굴>은 코로나로 인해 스케줄이 조정되다 11월에 마침내 개봉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잘 보기 힘들었던 케이퍼 무비라는 장르, 튼튼한 캐스팅 라인업으로 나름대로의 기대를 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코로나 시국 내내 규모가 있는 상업영화가 잘 개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영화의 등장이 반가운 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와는 다르게 <도굴>은 실망스러운 포인트가 더 많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경쾌한 리듬으로 괜찮은 볼거리를 선사하고는 있지만 매력적인 요소들을 뒤로하고 가장 핵심적인 '도굴'이 비교적 허술하고 황급하게 진행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상기했듯 영화의 때깔은 좋은 편이었다. 경쾌한 분위기로 몰아치면서 동시에 대사를 맛깔나게 살려내는 요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더불어 정말 '때깔' 자체가 좋은 편이었다. 호텔, 카지노, 금고 등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더불어 유적들의 흙맛이 한껏 첨가된 이미지를 오가며 시각적으로 아주 새롭지는 않지만 아주 볼만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 <내셔널 트레져>처럼 역사 유적이 주는 신비함과 미스터리한 이미지는 없지만 아주 현실적인 틀 안에서 적절한 답안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 특히 극을 리드하는 이제훈의 연기가 아주 좋았다. 앞서 언급한 경쾌한 분위기와 말맛을 살려내는 데 있어 굉장히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이미 <탐정 홍길동>이나 <파파로티>, <박열> 등에서 능청스러운 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낸 바가 있고 <도굴>은 그러한 이제훈의 연기력이 아주 잘 드러나는 영화다. 더불어 임원희와 조우진의 연기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상당히 과장되고 느끼한 캐릭터들이라 개인적으로 그리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아니었지만 만화적인 분위기와 두 배우의 연기력 덕분에 극 안에 녹아드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또 한몫하는 혜리 역의 박세완 배우나 그 대척점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신혜선의 연기도 좋았다.
이러한 장점들이 있지만 <도굴>은 그보다 단점이 더 크게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우선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역동적이지가 않으면서 동시에 템포가 느리다. 영화가 내세우는 방식은 땅을 파서 접근하는 것이고 몇몇 갈등 장치(암반, 수도관 등)를 놓긴 하지만 그 해결 과정 역시 그리 극적으로 큰 효과를 주지 못하는 방식이다. 물이 넘치는 상황이나 몇몇 촬영적인 시도를 통해(긴 땅굴을 빠른 원테이크로 훑는 장면 등) 무마하려 노력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느린 템포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도굴>은 갈등을 이끌어 나가고 마무리하는 과정이 허술하고 성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의 케이퍼 무비가 여러 인물들의 이익을 내세운 다변적인 갈등과 트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반전을 포함하고 있는데 <도굴>의 트릭과 반전은 그렇게 좋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특히 대부분의 상황이 땅굴을 파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도 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상황을 보여줄 여유가 없는 것도 한몫을 한다. 갈등이 절정으로 향하는 장면에서도 악역을 제압하는 데 있어 그럴듯한 근거 없이 상황이 벌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도굴>은 나름대로 케이퍼 무비의 법칙을 따라가지만 정작 그 법칙이 주는 맛은 잘 살리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는 영화였다.
괜찮은 조건들을 꽤 여럿 갖추고 있기에 <도굴>의 단점이 더더욱 아쉽게 느껴지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속편을 암시하는 듯한 마무리를 생각하면 나름대로 확장에 대한 야망도 있어 보이는 작품이지만 정작 첫 단추인 이 영화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특히 <도굴>은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에서 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오락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수요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영화의 단점이 개인적으로는 아쉽게 다가왔다.0개0개 - 2달 전닮고도 다른 것들의 변증법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보면 다양한 영화의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대작이 생긴다. 영화의 감독, 배우, 장르, 수상실적부터 이제는 A24처럼 제작사가 기대를 주는 정보가 되곤 한다. <베이비티스>는 그런 점에서 아주 생소한 영화였다. 76회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을 비롯 다수의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초청 및 수상을 하는 기록이 있긴 했지만 아주 특별한 장르도, 유명한 감독도, 유명한 배우도 찾아볼 수 없는 영화였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영화의 내용도 그렇게까지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이 영화가 그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아주 다른듯 하지만 닮은 것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그 끝에서 도출한 이 영화의 결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 수 있지만 아주 매력적이었다.
영화는 암에 걸린 밀라[엘리자 스캔런 분]가 우연히 모지스[토비 월레스 분]와 만나게 되면서 둘 사이,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는 영화다.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 헨리[벤 멘델슨 분], 은퇴한 음악가인 어머니 안나[에시 데이비스 분] 사이에서 태어난 밀라와 다르게 모지스는 금전적으로나 생활 수준으로나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밀라 가족과 모지스는 외적으로 상당히 다르고 헨리와 안나의 대사에서 이를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듯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그들을 그리 다르지만은 않게 바라본다.
영화 시작, 밀라와 모지스의 첫 만남 이후 병원에서 상담받는 헨리와 안나를 보여주면서 두 쌍을 각각 커플로 묶으면서 대등한 관계로 소개를 하고 음악 선생인 기든[유진 길페더 분]을 통해 안나 역시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시기가 있었음을, 그리고 그 모습이 밀라와 닮았음을 보여준다. 헨리는 모지스와 비슷하게 약물 중독의 증세를 보이고 약을 빌미로 모지스와 거래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헨리는 또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애완견을 기르는 이웃 토비[에밀리 바클레이 분]에게 끌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토비의 외형이나 당당한 태도는 모지스의 영향을 받은 뒤의 밀라와 흡사한다.
영화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에피소드, 각각의 상호작용들에 제목을 부여하며 마치 옴니버스와 같은 형식으로 구성한다. 다양한 챕터의 누적, 그 안에서 닮고도 다른 인물들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마치 정-반-합으로 이어지는 변증법과 같이 이어나간다. 그렇게 서로를 밀어내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나아가고 밀라의 병세가 짙어짐에 따라 점차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행복도, 감정의 골도 깊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밀라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무리는 밀라와 가족들, 그리고 주변인물들 모두가 해변에 놀러간 장면으로 한다. 밀라의 죽음 직전, 생일 파티와 자살을 결심하고 이를 수행하려 하는 모습, 이후 모지스와 나눈 뜨거운 사랑을 생각해보면 이미 영화는 가장 행복한 순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과 스스로의 고통을 극단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가장 저점에 해당하는 밀라의 죽음 이후 등장한 해변 씬은 초연한 태도로 이야기하는 삶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한 그 상태가 말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인물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간다는 내용의 영화는 이미 숱하게 많았다. 2011년 국내에 개봉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레스트리스>나 조셉 고든 레빗이 주연한 <50/50>과 같은 영화만 해도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이 이야기는 다뤄졌음을 알 수 있다. 담담한 시선을 주된 기조로 삼는 <베이비티스>의 연출적인 분위기도 그닥 새롭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주변 인물들과 폭넓게 상호작용하며 점차 벌어지는 양 극단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한 뒤 그 결론으로써 내놓은 영화의 결말은 정말 설득력이 있었고 흡인력이 있었다. 다양한 에피소드에 소제목을 담아 흐름을 조절하는 구성도 적절하게 느껴졌다. <베이비티스>는 섀넌 머피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노련하다고 느껴지는 영화였다.0개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