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98.86%
4.0


지금 여기서 감상

스트리밍

대여

구매


작품 정보

넉넉하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가장 리키,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며 택배 회사에 취직하지만 생각과는 다른 일상이 전개되고, 화목했던 가족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는데...

감독/출연

켄 로치
켄 로치
감독
크리스 히친
크리스 히친
데비 허니우드
데비 허니우드
케이티 프록터
케이티 프록터
리스 스톤
리스 스톤

리뷰

98.86%의 좋아요 평가를 받은 작품입니다.

1% 99%
4.5
  • 0
4
'미안해요 리키' 간단 리뷰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일 때문에 서울 용산에 위치한 LG유플러스 사옥에 가끔 간다. 한강대교 북단 옛 데이콤 사옥에 위치한 이 건물은 주변에 별 것이 없어서 대단히 한적한 편이다. 가끔 이곳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단체가 있는데 바로 '희망연대노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이 노조에는 LG유플러스의 설치기사들도 포함돼있다. 이들은 LG유플러스의 사업방향과 비정규직 처우에 대해 요구하며 노숙농성이나 집단시위 등을 벌인다. 인터넷이나 에어컨 설치기사들의 처우는 택배기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하청업체 소속이거나 '개인사업자'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원청의 간섭으로 빡빡한 스케줄에 조금 낮은 임금을 받는다. 이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정치권에서도 나서는 걸 본적이 있지만 아직 성과가 뭐 있는지 잘 모르겠다.

2.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를 봤을 때 우리나라 택배기사(혹은 쿠팡맨)와 유사한 처우를 보고 많이 놀랬다. "'개인사업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비정규직의 처우가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기형적으로 변화한 사회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켄 로치는 늘 그렇듯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것은 오랜 과거에서 비롯된 우리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며 개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3. '미안해요, 리키'의 가장 큰 화두는 ICT산업의 발달과 고령화사회다. 리키(크리스 히친)는 주택자금 대출에서 벗어나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일을 전전했다. 그러다 그는 택배기사의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확실히 과거보다는 택배가 늘어난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직접 장을 보는 대신 주문해서 배송을 받는다. 최근에는 '새벽배송', '주말배송' 등 택배기사 괴롭히는 서비스가 자꾸 등장한다. 직장인과 프리랜서 등 다양한 생활패턴을 가진 사람들의 요구에 충족하기 위해 서비스는 더 늘어날 것이다. 리키가 뛰어든 일은 ICT산업의 발달로 커져버린 서비스 시장의 중심이다.

4. 택배기사의 고용형태는 꽤 기형적이다. 이들은 명목상 '개인사업자'다. 개인사업자는 회사의 복리후생을 제공받지 않는다. (우리나라 기준) 당연히 4대보험이나 국민연금도 직장이 아닌 개인으로 처리된다. 번 만큼 가져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돈을 벌어야 하는 '개인사업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회사의 통제를 받는다. 이 통제는 그저 돈을 더 주고 덜 주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인사고과'에 해당된다. 개인사업자는 인사고과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하청'의 형태라면 원청의 간섭을 받을 이유 없이 주체적으로 운용돼야 한다. 그러나 택배기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 기준)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불법 고용형태다. 그들 각자가 '개인사업자'라면 원청은 그들이 어떻게 일하건 간섭할 이유가 없다. 프렌차이즈 음식점의 가맹 형태가 어떤지는 모르겠다. 프렌차이즈 가맹점주들이 영화 속 리키만큼 간섭을 받는다면 나는 이 주장을 접어야 할 것이다.

5. 고용형태에 대한 고발과 함께 이 영화는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리키의 행동반경을 통제하는 PDA다. 회사에서는 그 기기의 값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파손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그 대사 자체가 "이 기기는 잠시 후 파손될 것이다"라는 복선이다). 기기는 택배기사의 행동패턴을 통제한다. 2분 이상 운전석을 비우면 안되고 기사가 어디에 있는지 고객과 회사가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편의점에서 알바 감시용으로 장착한 CCTV와 닮은 꼴이다. PDA의 시스템(회사가 만든 근무시스템)은 대단히 비인간적이다.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할 틈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고객의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서비스를 강화한 것이다. 즉 PDA는 ICT산업의 발달로 변화된 일상을 보여주는 도구라고 볼 수 있다.

6. '국가 부도의 날'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우리에게 부조리한 고용형태의 등장은 IMF를 기점으로 시작됐다. 정규직들이 넘쳐나던 시대는 끝나고 비정규직이 확대됐으며 대부분의 주요한 일들은 하청업체를 통해 진행된다. 원청은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하청업체의 일에 간섭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하청업체 직원을 고용하고 원청이 직접 일을 시키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원청은 책임지지 않는다. 이런 부조리는 이미 수년간 이어졌다. 최근에는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서비스직 직접고용'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확대되진 않고 있다. 경제사정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리고 예상컨대 택배기사가 직접고용되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7. 리키의 일상과 함께 애비(데비 허니우드)의 일상도 주목해야 한다. 현재 ICT산업은 고령화사회에 맞춰 사물인터넷(IoT) 기기를 확대하고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의 건강상태나 활동패턴, 사고유무를 사회복지사나 가족에게 직접 알려주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보급을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늘어나진 않았다. 다만 제 아무리 IoT 기기가 발달하더라도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히는 행위는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고령화사회에 늘어나는 직업이 '간병인'이다. 이 직업조차 로봇이 대체하는 시대가 곧 올 수 있지만 당장은 인공지능(AI) 스피커로 유산슬의 노래나 틀어주는 것이 AI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많은 노인들을 돌봐야 하는 애비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남편 리키 못지 않게 빡빡한 삶을 산다.

8. 리키와 애비가 일에 치여 힘든 삶을 보내는 사이 셉(리스 스톤)과 리사(케이티 프록터)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셉은 친구들과 거리를 떠돌며 그래피티를 하고 학교에서는 반항적인 아이가 됐다. 리사는 겁이 많아졌다. 둘은 모두 스마트폰을 친구삼아 지내고 있으며 중요한 일상과 소통수단을 모두 그곳에 담아두고 있다. 당연히 부모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스마트폰이다. 영화에서 리키와 애비가 셉의 그림을 살펴보면 아이의 예술적 재능을 뒤늦게 알게 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이같은 의식의 흐름을 쫓다보면 결국 부모와 자식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은 ICT 시대의 변화된 일상이다. 정리하자면 리키의 발목을 붙잡는 것도 스마트 기기이고 셉과 리사의 일상을 차지한 것도 스마트 기기다. '미안해요 리키'는 스마트한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 잊혀지는 것에 대해 사회제도와 개인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비추고 있다.

9. 때문에 이 영화는 버릴 구석이 하나도 없다. 리키가 택배를 전달하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애비가 돌보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이 영화에서 굳이 '나쁜 쪽'을 꼽아보면 택배회사의 관리직원이나 간병인 용역의 전화상담사 정도다. 그런데 이들 역시 회사의 방침에 따라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리키와 애비가 만나는 사람들 중 까칠한 사람들도 꽤 있지만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저 일상적이다. 누구 하나 갑질다운 걸 하진 않는다(오히려 멱살잡힌다). '미안해요 리키'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는다. 잘못은 제도와 변화된 일상에 있으며 그것 자체에 책임을 물을 뿐이다. 이것은 꽤 희망적이다. 제도와 기술의 변화가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더라도 사람들 각자는 여전히 따뜻하고 유쾌하다. 이것은 우리가 '모던타임즈'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유다.

10. 결론: 이 영화가 드라마틱한 극영화라면 이 가족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멀리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주택자금 대출과 더 쌓여버린 빚 때문에 리키는 아픈 몸에도 일을 쉴 수 없다. 영화는 우리의 인간성에서 희망을 보여줬지만 당장 우리는 거대한 물결을 이겨낼 힘이 없다. 리키가 아픈 몸을 이끌고 운전하는 차는 그래서 후진을 한다. 그것은 차를 가로막는 가족들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밀려나는 리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대한 물결을 이겨낼 수 없다. 그 물결 속에서 죽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남길 바랄 뿐이다.


추신)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Sorry, We Missed You'다. 리키가 택배를 배송했는데 수취인이 부재중일 경우 남기는 메모에 들어간 문구다. 그리고 한글제목은 '미안해요 리키'다. 나는 이 제목이 참 불만이다. 제목대로라면 리키한테만 미안하고 애비한테는 안 미안한건가? 정작 가장 미안한 셉과 리사에게도 안 미안한가? 왜 리키한테만 미안한건지 궁금하다. ...솔직히 한글제목 바꾸고 싶다.


  • 1
3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회주의자 감독이 누군가의 부재를 그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켄로치는 전작 <나,다니엘블레이크>에서는 울림과 슬픔이 부재를 통해 발현했다면, 이번 영화는 함께 있으나 부재하는 이들의 슬픔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부재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이번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가족의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책상행정과 사회돌봄시템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본주의가 주는 벗어날수 없는 굴레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방식은 다르나 슬픔건 매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야기가 굉장히 침착하고 뚜렷하게 진행되는 영화를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과 카메라는 늙어가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점점 예리하고 따뜻해져서, 더 슬프게 느껴진다.


  • 1
4
다리 세 개 달린 개와 늙은 노인

이 글을 쓰기 전, 블로그에서 우연하게도 켄 로치의 영화가 굳이 영화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 영화인가?라 질문하는 한 평론가의 말을 본 적 있다. 그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하층민을 변두리로 밀려나게 만드는지 고발하며, 우리는 그 냉혹한 세계에서도 서로를 마주하며 인간성을 되찾아야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을 근거로 그 질문을 제시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극소수만 볼 수 있는 극장이 아닌 동시간 대에 수만 명이 볼 수 있는 TV드라마로 만드는 편이 낫고, 하층민에게 렌즈를 대는 것이 사회를 움직일 수 있다면 저널리즘을 쓰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이는 좋은 영화는 진실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언어로 정리할 수 없는 이미지로 관객을 현혹시키는 것이지, 무언가를 설득하거나 전파하고 선동하는 일은 영화가 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고, 그가 한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예로 켄 로치와 종종 비교되는 다르덴 형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두 감독은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둘의 영화를 보러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민의 삶을 다루는데 있어 현장감을 부여하려 비전문배우를 쓴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다르다. 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가 한 개인을 조명하는 데 있어 정반대의 방법을 쓰기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가 인물에게 있을 법한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차단하고, 인물 가까이서 그 인물의 일상을 현재진행형으로 찍는다면 켄 로치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연달아 등장시킨다. 대신 켄 로치는 이를 신파로 보이지 않게끔 감정이 복받쳐올 타이밍에 카메라로 그 인물을 멀찍이 본다. 다르덴 형제의 시작점은 다큐멘터리 영화고 켄 로치의 시발점은 TV영화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봐온 영화들과 다르나, 켄 로치의 영화들은 진실되고 투박하다. 설사 둘이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더라도, 다르덴의 <로제타> 속 로제타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카메라보다 켄 로치의 카메라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켄 로치의 카메라는 너무도 익숙한 구도로 찍힌다. 고로 나는 켄 로치의 카메라가 우리에게 새 체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르덴의 영화들이 인물을 응시하는데 비해 켄 로치는 메시지를 응축한 대사를 만들고 감독 그 자신의 관점을 도입해 구성을 짠다. 전자는 질문을 던질 뿐이고 후자는 질문을 던진 뒤 대답을 유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둘의 우열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둘 중 누가 더 정치적인가를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르덴은 카메라로 영화의 짜임새로 그 자신이 왜 영화인지를 증명했지만, 켄 로치의 경우 자연스레 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끝내 우리가 도달해야할 질문은 켄 로치의 영화가 어째서 영화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느냐는 질문이다. 예술이 세계를 바꿀 수 있디는 순진무구한 믿음은 이 시대에 무용할지도 모르는데도.

<미안해요, 리키>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후 메가폰을 내려놓기로 한 켄 로치 감독의 복귀작으로 그가 왜 돌아와야만 했는지를 보여준 영화다. 그간 켄 로치 감독은 그 자신이 속한 영국의 어두운 일면을 비춰왔다. 영국이 아일랜드에 가한 폭력(<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복지제도에 소외당한 노인(<나, 다니엘 블레이크>), 약자를 보호하지 않고 오로지 자본의 논리로 국가를 흘러가게끔 만드는 대처리즘과 신자유주의의 문제(<자유로운 세계)>를 다뤄오며 그 자신이 좌파감독라는 점을 증명해왔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그가 포착한 현재의 문제를 비추는데 의의가 있다. <미안해요, 리키>는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중계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의 문제점을 포착해, 인간이 어떻게 기계로 전락하는지를 비춘다. 바코드기계가 시간을 통제하고 인간의 기본욕구 배설욕과 식욕, 수면욕을 잠식한 시대에서 가족은 어디로 가는지를 감독은 찍는다. 이를 중심으로 고령화 사회와 점차 희망을 잃는 젊은세대 등 문제를 겹겹히 쌓아나가 시스템의 문제로 돌진한다. <미안해요, 리키>는 이 점에서 영국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대도시가 들어선 모든 곳의 이야기다.

<미안해요, 리키>는 일하던 건설회사가 부도가 난 탓에 해고당한 뒤 잡역을 도맡아하는 잡역부 리키의 이야기다. 그는 그 자신의 집을 갖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리키는 그 꿈을 이룰 수단으로 택배기사 일을 택한다. 택배 기사는 저마다 담당구역을 맡고 정해진 시간 내에 고객에게 택배를 배송한다. 이를 관리하는 회사가 있고, 기사들은 그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지는 시스템이다. 만일 자리를 비울 경우 대체인력을 구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패널티를 맡는다. 그들이 이런 환경에서 주 6일 하루 14시간 근무라는 강도높은 노동을 하는 이유는 이 택배노동이 시급제가 아니라, 배달 건수당 성과금 지급으로 임금을 받는 특수근무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건수에 따라 급여를 받기에 자신이 일하는 건수에 따라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이에 지원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만하지 않다. 리키는 이전 회사의 부도로 빚더미에 오른 상태고, 집을 사려 택배기사 일을 시작했지만 점차 그 회사의 부조리를 알아차린다. 업무용 벤을 대여할 시 대여료가 천문학적이기에 리키는 벤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태다. 리키는 희망을 지닌 채, 업무에 집중하지만 곧장 문제점에 봉착한다. 가족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내인 애비한테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아내도 간병인 보조로 일하며 환자들의 아침, 점심, 저녁을 챙긴다. 애비는 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가정학대 피해자로 가족이 무너지고 있지만 그들을 화해시키려한다. 이전의 시급제일 경우, 그들이 허투루 쓴 시간마저 보상받을 수 있고 여가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으나 이런 특수근무제의 경우 시간을 보장하는 제도가 없다. 그들은 바코드와 알람과 한 몸처럼 붙어, 그 자신을 기계처럼 생각하려한다. 리키의 아들 셉이 그들을 보고 점차 일탈을 시작하고 리키의 동생 리사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셉이 학교에 빠지고, 액션 페인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는 급기야 선생을 폭행해 정학당하고 리키가 징계위원회에 못 가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상황에서 리키와 셉은 싸우고 만다. 리키가 셉의 휴대폰을 빼았으며 셉이 가출한다. 그 다음날 밤 리키의 자동차 키가 사라지고 리키는 셉의 뺨을 갈긴다. 자동차키를 숨긴 것은 리사였고, 그 진실을 알고 난 뒤 리키는 셉에게 사과하려 한다. 그때 리키는 우연히 강도를 당한다. 얼굴뼈가 함몰된 상태인데도 그는 회사 규정으로 인해 벌금을 물 상태다. 리키는 그를 감당할 수 없어,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차를 몰고 회사로 간다.

이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로, 택배 배송시 고객이 부재할 경우 택배기사가 고객에게 남기는 쪽지다. 당신을 놓쳐 미안하다, 라는 의례적 문구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리키는 처음에 배송이 늦어 미안하다는 뜻으로 이 쪽지를 보낸다. 엔딩씬에서 리키는 이 쪽지에 "별 일 없을 것"이라는 메모를 써놓아 가족에게 보낸다. 리키는 그간 고객에게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왔으나, 그 자신의 가족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도 못한 사람이다. 이때 이 편지는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언뜻 신파로 보일 수 있으나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신파다. 리키는 이미 무너진 가족을 복원하는데 실패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리키>가 그간의 작품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안해요, 리키>는 셉의 세대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리키의 무기력한 시선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셉은 OBK라는 그 자신들만의 약호를 만든 그룹에 속해, 거리의 광고들에 페인트칠을 택한다. 광고란 인간의 소비욕을 자극할 뿐 그 자신들에게 결코 희망을 주지 않는다. 대학을 나온 선배는 콜센터 직원에 불과해졌고 청년들은 희망을 찾지 못해 다른 도시나 나라로 떠난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본주의 사회에 부딪히지 못한 채 예술로 도피하는 행동뿐이다. 리키는 이들의 도피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을 일탈하는 자들로만 본다. 그들은 그 자신들의 페인팅이 자본주의의 상징을 훼손한다고 믿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눈에 낙서에 불과하다. OBK라는 약호를 지닌 그들은 저마다의 연대감을 지닌 채 기성세대와 멀어진다. 그것으로서 그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듯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특수근무제에 짓눌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조차 없다. 영화에서 그의 가족이 여가를 가지는 것조차 리키의 벤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켄 로치가 본 사회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관료화하고, 상상을 대체해버린 자본주의 리얼리즘(마크 피셔)를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상태다. "모든 노동에 침투해, 스스로에 대한 감사관이 되어 그 자신을 성과로서만 존재하게 만드"는 이 자본주의에서 가족이 있을 시간이란 허락되지 않는다. 이에 체념한 셉은 일탈로 그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으려한다. 끝내, 리키는 셉의 그림을 보고 그를 이해하려 시도하지만 그 시도가 과연 그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빠져나오면 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꿈"을 꾼다는 애비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미안해요, 리키>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켄 로치의 절망이 깃든 작품이다. 그가 만일 TV로 이 메시지를 송출했다면 이 TV는 자연스레 광고가 따라붙고, 방송국의 의도에 따라 상품으로 포장될 것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그 자신을 OBK의 신호처럼 만들어 자본주의에 절망하는 제스처로서 작동한다. 점차 졸음운전에 시달리는 리키의 차처럼, 우리는 어딘가 부딪힐지 모르는 차처럼 폭주하고 있다.

<미안해요, 리키>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언뜻 스쳐지나가는 이미지에 있다. 셉이 OBK 페인트를 칠할 동안 그 옆으로 지나간 늙은 노인과 발이 하나 잘린 개가 산책하는 이미지다. 켄 로치가 그간 작품에서 그려낸 적 없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이는 리키와 셉의 관계를 은유한다. 늙은 노인과 발이 하나 잘린 개는 서로 연대하는 관계지만 언제 부딪힐지 모르는 식으로 삐걱거린다. 켄 로치는 이처럼 사회가 기괴하고 슬프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사회로 그려낸다.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 하나가 이 영화가 내 마음에 남은 이유다. 켄 로치가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는 그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가 아니라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다. 그의 체념은 선명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영화 곳곳에 튀어나온다. 예술이 정치를 움직일 수 있다는 순진무구한 믿음은, 그것이 무너짐으로서 제 의의를 얻는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나는 처음으로 켄 로치의 영화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사회를 응축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OBK기호를 만드는 셉처럼. 알레고리와 상징이 제 아무리 식상하다 누군가 말할지라도 말이다.


  • 0
3
기술이 가능하게 한 것,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켄 로치라는 사람을 두고 어떠한 수사를 덧붙이든 간에 그에게 성립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사는, 육체적 늙음에도 여전한 정신적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인임에도 시대의 문제에 온전히 대응한다는 점이 그렇다. 쉽게 말해 노인 세대는 보통 현세대와는 세대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으로 치면 이는 단순한 일상 속 대화에서부터 광화문 광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격차를 포괄한다. 그런데 켄 로치는 동시대에 무엇이 필요한지, 영화에 무엇이 재현되어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쉬운 말처럼 들리지만 보통은 나이가 들수록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지난날을 여전한 수사로 고집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변화에 대한 적응의 실패이기도 하고 거부이기도 하겠다는 점에서 늙음이란 가장 큰 완고이자 숙고임일 테니 말이다.

완고가 숙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만 숙고가 완고로 이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해본 것이라도 그게 틀리다면 언제든 내버릴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무엇이 맞고 틀린지의 문제가 그곳에 전제되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완고와 숙고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말이라는 점이다. 완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이는 성공하면 뚝심이 되지만 실패하면 아집이 된다. 반면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은 결과가 좋지 않을지언정 그 노력의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어쨌거나 은퇴를 선언했던 켄 로치가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만든 영화라면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이 영화는, 켄 로치에게 있어 길거리에 반짝이는 돌맹이와 같아서 주워들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였을 것이다. 쉽게 말해 그것은 숙고보다는 완고에 가까운 결정이었으니 뚝심이거나 아집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2.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가며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미안해요, 리키>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개봉했지만, 원제로는 ‘Sorry, We Missed You’라는 이 영화의 본래 맥락은 다음 둘 중 하나로 읽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부재중인 이에게 남기는 이 메시지는 ‘우리가 당신을 놓쳤다.’거나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인데, 전자는 비즈니스에 가깝고 후자는 전자보다는 인간적으로 들리는 문구다. 전자는 이미 놓친 상황에서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아직은 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이별의 순간에서도 익숙하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맥락으로 보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멀리 있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는 돌아올 수 있는 선, 임계점을 넘어섰는지 아닌지와 같은 한계에 있다.

소위 말하는 ‘선’이라는 것을 넘어선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들 말하고는 하는데, 이는 선을 넘는 모든 종류의 행태와 행위에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인간의 형질이 본연적으로 변하게 되는, 스프링으로 치면 탄성계수를 넘어 원위치로 회복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켄 로치가 해당 문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영국 사회의 어떤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다’고 말하면 언제든지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말하자면 회복의 여지가 남아있는 희망적인 말이 되지만,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라고 말하면 추후라도 만남의 여지를 주지 않는 완벽한 단절의 말이 된다. 예컨대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상대와의 관계가 완벽히 단절되기를 고지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3.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절을 적극적으로 바라는 것에 반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핵심은, 단절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단절되기를 바라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의도적으로 서로를 등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삭막한 세상이 되어서일까. 조금 편견을 담아서 말하자면, 세상을 다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노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시대에 젊은이들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과도 채팅 서비스를 통해 대화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니 말이다. 다르게 보면 디지털 서비스가 사람들을 더 잘 잇게 된 만큼, 더 잘 멀어지기도 하는 아이러니함이 도출되는 현 상황에 대해 노감독은 어떤 한마디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채팅 서비스에서 개인은 개인의 표지를 명확하게 가지기에 발화의 책임과 경위가 개인에게로 돌려지지만, 현실에서의 대화가 다방향적이고 확산적인 성향을 띠기에 대화하는 장소의 주변부 사람들이 엿들을 수도 있는 것처럼, 디지털 서비스라는 건 자신이 타인에게 무언가를 전달할 때 확실하게 전했다는 인식 또는 책임의 전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황금 종려상을 받았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모니터 안의 점과 선으로 지목되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 모니터 안의 디지털 시민을 조명하고, 카메라는 그 바깥의 것들을 바라보면서 디지털의 반대편이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의 바깥’이라는, 도심의 외곽이라는 말을 했다. 쉽게 말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로 이행하게 된 2000년대 이후의 사회 시스템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두 개의 세상이 아닌, 디지털이 주류인 상황에서 그 바깥으로 나가면 매트릭스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처럼 허허벌판의 고독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에 동화되는 이들, 주로 젊은이와 같은 신세대만이 도심의 중심부 시온으로 진입할 수 있고, 그에 동화되지 못한 이들은 매트릭스라는 디지털로 세워진 환영의 도시로부터 내쳐져 알몸인 채로 야생에 버려진다. 물론 시대의 흐름인 만큼 디지털이라는 것에 편입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는 복지 시스템을 비롯한 전산이 모두 디지털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디지털 시민화에 근거한다. 디지털 전산에 등록되지 않으면 그는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되어버린다. 반대로는 사망했더라도 사망 신고를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 노령 연금을 계속 타 먹을 수 있기도 하다. (<어느 가족>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예컨대 디지털 시대에 개인은 디지털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4.

그러니 나도 위의 두 표현 중 어느 하나와 끊어지고 싶지 않기에 적당한 표현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다른 이들이 그걸 이해해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미안해요, 리키>에는 주인공 사내에게 중간 관리자가 “고객들이 보는 당신은 손에 든 디바이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말에 따르면 택배기사인 그는 고객들이 거는 클레임에 감정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객들은 택배기사인 그를 인간이 아니라 시스템의 일부, 기계장치의 톱니 정도로 보고 있고, 따라서 고객이 그를 인격체로 보고 있지 않으므로 고객의 비난은 인간이 아닌 시스템에 가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정이 디지털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모니터 안에서처럼 평균값으로 나누어떨어지지 않기에 개인에게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고 시스템이 그에 일일이 대응할 수 없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모니터 바깥의 삶은 모니터 안의 삶보다 치열하며, 시스템의 일부는 시스템의 바깥을 보듬는 것에 할애되어야 한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마디만 하자면 디지털은 어디까지나 아날로그를 기반으로 한다. 현실에 쌓아올린 게 디지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시스템의 바깥을 보듬어야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디지털이 아날로그에 손을 뻗는 행위를 두고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어찌 되었든 간에 구원의 시도는 이루어졌다는 것일 테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다.’는 말이 미안함을 어느 정도 담은 표현이라면,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는 어쩔 수가 없었다면서 책임의 행위를 외부로 돌려버린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표현 중에서는 책임의 주체가 명확한 전자 쪽이 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책임의 소재가 표면적으로나마 명확한 것은 바로 디지털이다. 아날로그 세계에서의 상이 오아시스 곁의 신기루처럼 아예 허황된 것일 수도 있지만, 디지털 시대의 상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분열된 것이라는 점에서 어찌 되었든 간에 그 형체는 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을 놓쳤다.’는 아날로그적 표현(택배 방문을 통해 남기는 메모이니)보다는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라는 디지털적 표현이 더 따스하게 들리는 이상한 상황이다.


5.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켄 로치는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아니었는가? <미안해요, 리키>를 통해 켄 로치는 우리의 그런 의문에 답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리고 켄 로치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일 테고 말이다. 말하자면 켄 로치는 디지털 시대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는 그가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노인이라는 게 아니라 이전의 관심사가 디지털 시대에 다른 방향으로 연장되었음을 알려준다. 켄 로치의 관심사는 언제나 시스템 바깥의 사람이었고 디지털 시대의 시스템은 디지털이니 디지털 바깥의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전의 아날로그가 주류이던 시스템 사회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와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있었다. 그런데 이건 디지털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나란히 두고 보면 아무래도 디지털 쪽이 더 사람들 간의 연결을 끊어놓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디지털은 초시대라는 이름으로 초연결을 행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이전보다 더 많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육체적으로는 아니어도 통신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음을 논한다면 그렇다. 다르게 말하면 디지털 시대에는 육체가 밀접해 있지 않으니 감정적으로 무언가 단절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켄 로치가 눈여겨본 지점이다. 켄 로치가 <미안해요, 리키>에서 지적하듯이 디지털 시대에 완전히 접근해있는 자녀 세대에게 휴대폰이란 삶의 전체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 한 편에서도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가 나뉘어 있고 그중에 디지털 세대에게 디지털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신의 모든 것에 해당한다. 쉽게 말해, 켄 로치가 눈여겨보는 것은 우리가 삶을 피폐하게 한다고 말해왔던 디지털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아주 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간명한 사실인 이유는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것의 등장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6.

주인공 사내의 아들은 친구들과의 연락은 모두 휴대폰으로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의 만남과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디지털이란 삶의 전부이지만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이는 “현실은 언제나 현실에 있다”는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사람의 말 (<레디 플레이어 원>)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면서도, 적어도 아직은 디지털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켄 로치가 정말로 보여주려는 것은, 디지털 사회에는 오히려 디지털 이전에 태어난 이들이 아날로그를 더 홀대한다는 점이다. 이는 택배 노동자인 주인공 사내를 택배 회사의 부속품, 택배를 옮겨주는 기계 정도로 취급하는 택배 수령자들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오히려 주인공 사내의 어린 딸이 그와 동행할 때 더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전의 관점으로 보면 이 장면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공산이 크다. 아날로그 시대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자녀가, 아날로그로 진행되지만 디지털화된 미숙한 업무를 좋아한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두 개의 세상이 있고, 디지털의 바깥에 아날로그라는 발할라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둘이 서로 보완재라는 점을 보여준다.

켄 로치가 하고자 하는 말은, 켄 로치가 달라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일종의 계급처럼 분화된 사회가 아니라 그 둘이 상호작용하며 집요하게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이다. 이 관점의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켄 로치가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만들어야만 했던 작품이라는 점에 대한 설명은 될 것 같다. 켄 로치의 이전 영화가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이라는 게 곧 정보로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과도 같은 것이라는 점, 말하자면 전통적인 계급이 아니라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세상이 삶을 갈라놓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켄 로치의 이번 영화는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에 기술이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에는 사람이 자리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니까,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의 영토가 점차 넓어지고 있고 그중에는 아직 인간의 영역으로 남은 곳도 있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게 꼭 그런 영토의 흐름에 직접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켄 로치의 이번 공언은, 기술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보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그러해야 한다는 이전 작품에서의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즉 그는 기술이 가능하게 한 것들이 아니라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살펴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0
4.5
‘켄 로치 감독이 던진 세 가지 질문, <미안해요, 리키>‘

알다시피 켄 로치 감독은 영국 노동계급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를 조명하는 영화를 지금까지 만들고 있는 거장이다. 전작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는 관공서의 복잡한 절차를 포함한 영국 관료제의 문제가 어떻게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는지를 키친 싱크 리얼리즘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리고 제72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은 영화 <미안해요, 리키> (2019) 또한 이와 같은 경향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안해요, 리키>는 전작보다 더 학문적인 관점에서 꿈과 행복을 박탈당하는 영국 노동계급의 현실을 바라본다. 우선, 주인공 ‘리키(크리스 히친)’가 취직한 택배 회사의 ‘책임자(해리엇 고스트)’에게 갈등론적 관점을 부여해 자본주의가 불평등구조를 어떻게 정당화하는지 이야기한다. 그런 다음 ‘운명 비극’의 측면에서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리키’의 삶을 분석함으로써 운명이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본다. 끝으로 교육 사회학적 입장에서 주인공의 아들 ‘셉(리스 스톤)’의 일탈 행동의 원인을 생각해보고 이에 해당하는 교육 평등 이슈를 담론화한다.

1.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을 무너뜨리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가?

켄 로치 감독은 초반부터 택배 회사 책임자의 입을 빌려 자본주의가 ‘리키’를 포함한 노동계급을 어떻게 소모하고 버리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다. ‘리키’는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그리고 경험을 쌓은 후 본인 사업장을 갖기 위해 택배 회사에 취직한다. 이때 책임자는 ‘리키’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책임자는 ‘리키’에게 본인이 직접 관리해야 하는 구역이 생겼으니 이제 자영업자가 된 것과 다름없다고 말할뿐더러, 계속 가족적인 가치가 담긴 단어들을 활용하며 앞으로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함께 일할 거라며 ‘리키’를 안심시킨다. 이처럼 책임자가 처음에 ‘리키’ 앞에서 보인 따뜻한 모습은 갈등이론과 연관성이 있다. 갈등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관계의 모순과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불평등의 재생산을 정당화한다는 이론으로, 책임자는 계급구조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중간자 위치에서 ‘리키’에게 공정성과 가족적인 가치를 내세워 기회균등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책임자가 내뱉은 말의 이면에는 지배집단의 이익을 보편적인 이익인 것처럼 호도함으로써 특권층을 비호하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다. 더군다나 책임자는 이 환상을 토대로 근로고용계약서 작성을 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여기고,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노동계급이 기계처럼 비합리적으로 일하다가 폐기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책임자는 ‘리키’에게 택배 업무를 위한 비싼 기계를 제공하면서 분실 및 고장 시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오직 가족과 함께 하는 밝은 미래만 생각하는 ‘리키’는 자본주의 계급 관계 간의 모순이 합리화되는 과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서서히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끊임없이 초과근로수당 없이 초과근무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휴가를 갈 수 없는 상황임에도 ‘리키’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투입되는 노동력이 많아질수록 기대하는 미래와 점차 멀어지는 반비례 현상이 일어난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리키’를 포함한 노동계급은 작업수행에 알맞은 인지적 및 사회적 기능을 갖춘 인간 자본으로 재탄생했을 뿐 언젠가 버려질 처지에 놓여 있다. 후반부에 ‘리키’는 괴한의 습격으로 몸을 가누는 게 힘들어졌는데 택배 회사 책임자는 다짜고짜 ‘리키’에게 의료 보험을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할 뿐만 아니라 기계 파손 및 택배물 분실에 대한 모든 책임은 ‘리키’에게 있으니 비용을 부담하라고 통보한다. 심지어 책임자는 철면피한 태도로 당분간 대신 업무를 볼 대체 기사를 찾았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리키’의 아내가 분노를 표출하지만, 책임자는 ‘리키’를 직원이 아닌 자영업자 취급하며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리키’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계급 간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특정 계급의 이익만 증가하는 사회 시스템을 고발할뿐더러 이를 존속시키는 자본주의의 계급 편향성을 지적한다.


2. 운명이 한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중 한 명인 소포클레스의 대표적인 작품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은 운명 비극에 속하는 희곡 문학으로 희극과 달리 개인에게 집중하고, 그 개인에게 운명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운명 비극에서 주인공에게 드러나는 특징이 세 가지가 있다. 우선, 주인공은 계급뿐만 아니라 성품에서 고귀함이 드러난다. 오이디푸스는 용맹할뿐더러 테베(Thebes)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자 이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 그렇지만, 계급과 성품에서 드러나는 고결함은 끝에 맞이할 몰락 혹은 비극을 더욱더 극적으로 만든다. 두 번째 특징은 과거에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잘못된 행위를 하거나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가 자기 친아버지인 줄 모르고 우발적으로 살해한 사건이 이에 들어맞는다. 세 번째 특징은 주인공이 자만심(hubris)에 차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자만심은 신이 내린 신탁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를 가리킨다. 즉,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구하기 위해 하는 모든 언행은 자만심에 해당하며, 과거에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를 찾아 처벌하라는 공언이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된다.

이를 토대로 ‘리키’의 삶을 분석하자면, ‘리키’는 오이디푸스처럼 계급과 성품에서 모두 고귀함을 지닌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 가족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에서 그의 성품이 고결하다고 볼 수 있다. ‘리키’는 잠을 많이 못 자면서 과도한 업무량을 처리해야 하지만, 이렇게라도 가족의 행복을 수호할 수 있다면 견뎌낼 수 있다는 인내심과 용기를 보인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인내심이 강화될수록 ‘리키’가 미래에 대면하게 될 비극의 크기는 점점 커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리고 비록 ‘리키’는 오이디푸스에서 드러난 두 번째 특징과 관련이 멀지만, 세 번째 특징인 자만심을 드러내는 인물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리키’는 열심히 일한다면 언젠가 노동계급으로서의 운명을 극복해 경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지금보다 편리한 생활을 안길 수 있다고 굳건히 믿는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혹은 그 시스템에 소속된 특권층의 입장에서 인간 자본에 불과한 ‘리키’의 긍정은 자만심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아래 ‘리키’의 긍정적인 가치관은 의도치 않게 자만심으로 해석되고, 안타깝게도 ‘리키’는 지배계급에 자신의 모든 피와 살을 내놓는 운명에 갇히게 된다.

3. 학교 교육이 사회의 평등에 기여하고 있는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리키’와 달리 그의 아들 ‘셉’은 일탈 행위를 일삼으며 관객의 분노를 유발한다. 그렇지만, 켄 로치 감독은 관객의 격앙된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셉’의 일탈을 여러 차례 제공한 게 아니다. 켄 로치 감독은 ‘셉’을 통해 사회의 평등에 기여해야 하는 기관인 학교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영국의 교육 현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영국의 교육 이념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개인의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영국이 이와 같은 교육 이념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켄 로치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영국의 교육제도는 과거의 계급 질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트 교육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영국 교육 시스템이 계급과 성별에 상관없이 학생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부여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의미다. 특히, 공부를 잘했던 ‘셉’이 어느 순간부터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사회 규범에 저항하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는 상황은 교육이 계급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평등에 전혀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과 유관하다.

교육 평등관은 기회의 평등에 해당하는 허용적 평등과 보장적 평등, 그리고 내용의 평등에 해당하는 교육 조건의 평등과 교육 결과의 평등으로 나눌 수 있다. 허용적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받을 기회만 균등하게 허용하면 교육 평등이 실현된다는 견해고, 보장적 평등은 경제적, 지리적, 사회적 제반 문제를 해결해서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취학을 보장한 것을 평등으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교육 조건의 평등은 교육 조건을 평등하게 마련했을 때 평준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교육 결과의 평등은 교육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학업성취 혹은 이로 인한 삶의 기회 및 소득에 있어서 계급 간 격차가 작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극 중에서 학교는 교사를 폭행한 ‘셉’에게 유기정학 처분을 내렸고, 집에서 컴퓨터로 수업을 들으라고 결론을 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학교가 학생에게 유기정학을 내릴 때 교육 자료, 교육 방법, 교육 시설 등 교육 조건의 평등을 실현했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전자기기 사용과 온라인 수업이 교육 여건상의 차이를 줄이는데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현실은 경제적 상황 때문에 연락을 주고받기 위한 휴대폰 이외 전자기기를 갖추기 힘든 가정이 상당수 있으며, ‘리키’의 가족이 그런 가정들을 대표한다.

또한, 가구에 컴퓨터가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내린 학교 측의 결정은 불우계급이 겪는 각종 사회적 제반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장적 평등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셉’의 언행은 윤리적으로는 옳지 않지만, 교육 결과의 평등이 성취되기 힘든 영국 현실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므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 ‘리키’는 자식들이 본인의 고된 삶을 물려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셉’에게 예전처럼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진학하고 원하는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타이른다. 즉, ‘리키’는 교육을 매개로 소득과 삶의 기회에 있어 계급 간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안타깝게도 ‘셉’은 부모의 입장과 정반대의 견해를 드러낸다. 아마도 ‘셉’은 학교생활에서 깨달은 점과 대학을 졸업했지만 계급 차를 극복하지 못한 주변 지인의 사례를 바탕으로 교육의 보상적 평등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자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날 선 형태로 표출한 게 아닐까 싶다.

“If young people don’t make a change, we’re all lost” (2019년 11월 1일 ‘Get into Film’와의 인터뷰 중에서)

결론적으로 관객은 <미안해요, 리키>에서 노동계급을 위한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만, 켄 로치 감독은 잔혹하더라도 관객이 노동계급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사실주의적 접근과 학문적인 접근을 동시에 활용한다. 따라서 켄 로치 감독은 아파도 가족을 위해 출근하는 ‘리키’의 모습과 그의 출근길을 막으려는 나머지 가족 구성원의 장면에서 관객들이 가족애를 느끼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와 자녀들의 만류를 뿌리쳐야 하는 ‘리키’를 포함한 노동계급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기를 바라고, 이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 사회개혁에 관한 방안을 같이 논의하자고 호소한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