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

The Irishman

97.83%
4.2


지금 여기서 감상

스트리밍


작품 정보

숱한 세월이 흐르고, 그가 입을 연다.

버팔리노 조직에 충성했던 암살자 프랭크 시런.

그가 봉인해온 비밀들이 세상에 드러난다.

격찬을 받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걸작.

예고편


감독/출연

마틴 스코세이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로버트 드 니로
로버트 드 니로
프랭크 시런
알 파치노
알 파치노
지미 호파
조 페시
조 페시
러셀 버팔리노
제시 플레먼스
제시 플레먼스
처키 오브라이언
바비 카나베일
바비 카나베일
펠릭스 '스키니 레이저' 디툴리오
안나 파킨
안나 파킨
페기 시런
하비 케이틀
하비 케이틀
안젤로 브루노

리뷰

97.83%의 좋아요 평가를 받은 작품입니다.

2% 98%
3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쓰이는 여기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마틴 스콜세지가 로버트 드니로에게 말했다. 그렇게 로버트 드니로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주연을 맡았다. 여기서 로버트 드니로는 택시를 타고 과거의 미국으로 넘어간다. 이때 <백 투 더 퓨쳐>의 마티가 박사님에게 물었던 질문처럼, 넷플릭스 영화를 만든 마틴 스콜세지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마티, 왜 하필 넷플릭스인가요?” 그러자 노년의 ‘마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티는 마틴 스콜세지의 애칭이다.) “이런 짓에 돈을 대줄 회사가 없었거든.” 마티는 신경질이 약간 섞인, 하지만 여전한 중후함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모름지기 과거로 돌아가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 법이지.” 박사님의 이 말처럼 <아이리시 맨>은 로버트 드니로의 젊은 시절을 CG로 처리하는데 예산의 대부분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마틴 스콜세지에게는 로버트 드니로의 젊은 날이 몹시 중요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로 젊어지는 것도 아닌데, 역사 체험 따위에 그렇게 큰 돈을!”라고 <백 투 더 퓨쳐>의 마티처럼 말할지도 모른다. 한 마피아의 시선으로 미국의 과거를 그려낸 이 작품이 영화에만 그친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마티가 드로리안을 타고 떠난 옛 미국의 풍경처럼, 이곳은 현실의 또 다른 면에 자리하는 시간선일 뿐이니 말이다.

신기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 마티에 대한 물음이자 답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현실이 될 수 없는 현실을 왜 굳이 그려야만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다른 쪽의 답변을 제안한다. 마틴 스콜세지가 주연 배우들의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기 위해 소모한 비용은 이것이 마티가 아닌 박사님의 영화라는 점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배우가 아닌 감독의 시선으로 그려졌다. 영화는 원래 감독이 만드는 것이니 그 산물은 감독의 시선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라는 두 명의 배우를 두고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여기에 버젓이 서 있는 두 명의 아우라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큰 무례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드니로와 파치노의 <대부>를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세대가 등장할 테다. 하지만 아직은 드니로와 파치노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스콜세지는 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닫으려 한다.

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뻔해도 좋은 이야기다. <아이리시 맨>의 시작과 끝은 드니로가 들어앉은 방의 입구와 출구이다. 영화의 내용은 그 시작과 끝 사이에 자리하는 드니로의 삶이다. 그러나 회상의 형태로 진행되는 이 영화가 이미 완성형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드니로는 이미 늙어있다. 영화가 끝나도 드니로는 늙어있다. 이 중간 사이에 자리하는 건 카메라가 문으로 들어갔다가 문으로 나오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년의 드니로가 지난 삶을 회상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허나 핵심은 이것이 노인의 회고록이라는 점이 아니다. 입구와 출구로 카메라가 들어가는 과정에서 문을 열고 닫는 동작이 생략되어있다. 표면적인 이유를 찾자면 이곳이 요양원이기에 노인들을 위해 문을 만들지 않아서다. (휠체어를 탄 채로 문을 열기란 불편한 일이다.) 허나 삶을 회고하는 기억의 출입구에 문이 달려있지 않다는 점은, 그 기억의 경계가 딱히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요컨대 그곳에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노신사의 늙은 기억에는 걸림돌이 없다. 휠체어를 타고 감에 있어 바닥에 문턱이 있으면 안 되듯이, 휠체어를 탄 드니로에게 회상의 걸림돌은 없는 것이다.

요양원을 배경으로 시작과 끝을 매듭짓는다는 것. 이것이 그가 편안한 여생을 살았음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들려주는 이야기를 편한 마음으로 들으라는쯤의 충고는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생각을 다른 측면으로 접근해보자면, 이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가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택시 드라이버의 드니로는 자신이 믿는 일에는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속된 말로 하면 우리에게 드니로는 뒤로 가기 없는 직진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실은 <아이리시 맨>의 이야기가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이 지미 호파를 살해했음을 털어놓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이 조언은 유효하다. 초점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켜보면 스콜세지나 드니로, 파치노의 영화 전반에서 문짝이 성할 날이 없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의 영화에서는 걸림돌이라는 게 정말로 많았다. 그곳에 걸려 넘어지는지 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당장 <대부>를 돌아보면 문 너머로 사람을 쏘아 죽이거나, 한쪽에서는 행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다른 쪽에서는 암살의 현장이 진행되고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2.

영화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스콜세지가 마블 영화를 두고 말한 발언이 눈에 띈다. 스콜세지는 마블 영화를 두고서 모종의 아쉬움을 표한 바가 있다. 이때 우리가 그 내용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지 않는다면 다른 점을 눈여겨볼 수 있다. 마블은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을 통해 자사의 마블 프렌차이즈 영화에 대해 간접적인 농담을 건낸 바가 있다. 이 영화에서 제이크 질렌할은 “이 좋은 기술을 왜 이렇게 써먹지 않는 거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실 CG 기술이라는 게 꼭 휘황찬란한 미래를 보여주는 것에만 사용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CG란 우리의 한계를 보완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다. 그것이 도구이므로 우리가 그것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도구에 휘둘리게 된다면 그것은 더는 도구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이것이 <파 프롬 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인간의 상상력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미지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 그 형상을 좀 더 잘 빚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우리를 이미지의 형상 안으로 끌어당겨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미지로 쌓은 집이 제국으로 변모하게 될 때, 그것은 이미지에만 그치지 않고 현실에 손을 뻗게 된다. 이미지에 지배당한다는 점에서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마블 영화에서 질렌할은 “대중에게는 그들을 인도할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미지가 우리를 지배하는 게 긍정적으로 평가될 때가 생기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간이나 관계처럼 물질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은 카메라 자체만으로는 재현되지 않는다. 마틴 스콜세지도 그것을 잘 알기에 <휴고>에서 현실의 카메라라면 하지 못할 카메라의 움직임을 컴퓨터를 통해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휴고>가 조르주 멜리어스에게 바치는 헌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컴퓨터는 영화 역사의 현재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휴고>의 카메라는 시계탑을 관통해 오래된 기계 태엽 인형을 바라보았고,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시간에 기계를 더한 ‘시간기계’로서의 영화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비가역적으로 달려온 뤼미에르의 열차가 도착한 장소는 바로 (조르주 멜리어스의) <달나라 여행>이었을 것이다.

허나, 이 지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달나라 여행>이 영화사상 최초의 ‘CG(의 조상님격)’에 해당한다는 점이 아니다. 스콜세지가 <휴고>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에 헌사를 바치는 방식이 과거의 CG를 현재의 CG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지가 두둥실 떠오르는 3D 포맷의 <휴고>는, 매체가 아닌 이미지의 측면에서 우리 눈 앞으로 떠오르는, 과거의 열차가 스크린으로 달려오던 것처럼 현재의 그래픽은 우리 눈으로 달려온다고 말할 수 있는 ‘입체’의 형식이었다. 예컨대 CG의 본래 역할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측면이 아니라 ‘있는 것을 보다 더 생생하게 만드는’ 사실성의 측면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이게 CG가 왜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 도구로만 남아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CG가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할리우드의 늙은 시네아스트들은 말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도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그 점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다소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우리가 접하게 된다. 그들이 CG를 대하는 태도가 ‘넷플릭스라는 시대이자 매체’를 대하는 태도와 얼추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듯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 영화가 ‘시네마’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는 물론 마블이라는 콘텐츠가 아니라 마블이라는 콘텐츠가 다루어지는 방식과 그걸 둘러싼 주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스콜세지는 영화관에 모여 영화를 함께하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함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파리의 시네마테크에 앉아 낯선 이들과 함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을 감상하는 경험은 넷플릭스가 줄 수 없는 경험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스콜세지는 영화를 찍기는 어려워졌지만 영화를 보기는 쉬워진 현 상황을 두고 그런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영화가 점점 더 상업논리를 따라간다는 뜻이다. 다른 분야지만 웹툰의 사례를 들어보면, 일주일을 쉬지 않고 일해 한 편을 연재하고 나면 그것을 5분 만에 읽은 독자는 100원짜리 미리보기 구독권으로 작가를 향한 독설을 쏟아낸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를 떠나서 5분이라는 시간과 100원이라는 금액에 갑질을 당하는 행태가 작가에게는 좋게 보이지 않을 것임을 그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스콜세지는 창작자가 소모한 시간이나 정성만큼의 노력을 관객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예우만큼은 갖추어주기를 요청한다. 말하자면 이는 영화를 만드는 이와 소비하는 이 사이에 자리하는 예티켓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리시 맨>을 집에서 본다면 아이패드와 같은 큰 화면을 보라고 권장했다.) 그는 영화가 단순히 유희를 위한 도구로만 취급되는 것에 반대한다. 도구로서의 영화가 우리 삶에 어떠한 교훈이나 재미를 안겨줄 수는 있겠지만,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던 이미지 이전 시대의 유희가 어디로 갔는지를 그는 묻는다. (3D라는 입체가 촉각을 대변한다면, 그 이전에는 본다는 것, 즉 시각이 주류였었다.) 예컨대 이는 스콜세지가 왜 <아이리시 맨>을 노화하는 방식으로 촬영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만약 스콜세지가 예산을 줄이고자 했다면 <대부>처럼 젊은 시절에는 다른 대역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대부> 시절에는 CG가 없기는 했다.) 하지만 스콜세지는 주연 배우를 그대로 늙어가는 것처럼 만들었다. 다르게 말해서 그는 영화 속의 인물이 영화라는 비가역적 매체와 함께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관객이 그들의 노화를 눈으로 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함께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기쁨, 이는 감독 본인에게도 적용되는 성숙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노년의 감독이 노년의 배우에게 보내는 러브콜인 셈이다.


3.

마틴 스콜세지는 <아이리시 맨>에 돈을 투자하지 않은 할리우드의 여러 배급사를 두고서 서운함을 드러낸 바가 있다. 그도 나이 든 배우를 젊게 만드는 데 예산의 절반을 쏟아부은 영화에 선뜻 돈을 투자하기가 꺼려지는 게 이해는 갔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서운함을 드러낸 지점은 ‘청년 시절을 연기할 대역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굳이 나이 든 배우를 올타임으로 기용해야만 했던 이유를 이해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었을 테다. 말하자면 스콜세지는 배우가 대체 불가능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한 많은 감독들이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인물의 컨셉에 맞는 배우를 미리 염두에 두기도 한다. 그가 아닌 이 배역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상상할 수 없다고 말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게 바로 CG라는 상상적 이미지의 산물이다. 지금까지 할리우드에서는 죽은 사람을 영화에 출연시키려는 갖은 노력이 이어져 왔다. 이는 영화 촬영 중에 사망한 배우의 남은 분량을 대체하기 위한 사례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죽은 사람을 스크린 위로 끌고 오려는 사례가 있기도 했다. 브루스 리나 마를린 먼로, 제임스 딘과 같은 이들은 배우이기 이전에 ‘시대의 아이콘’이기도 했기에 그들을 스크린으로 직접 호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죽은 이의 얼굴을 뒤집어쓴,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이름의 유령은 망자를 모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고작 얼굴 가죽만을 재현한 CG는 배우의 역할을 외견으로만 규정지어버리고, 배우는 영혼을 연기하는 직업이기에 그것은 큰 모독이라고 말이다.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게 현존하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 것에 주로 사용되기는 하나, 우리는 그 범주 안에 시간과 같은 관념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간과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가 시간에서 자유롭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 안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든 간에 ‘영화일 뿐’이라는 말로 타협해버린다. 하지만 영화는 본디 시와 유사한 매체이다. 시가 쓰이는 방식이 떠올린 이미지를 곧바로 써내려가는 것, 즉 이미지를 지면에 맞닿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지를 지면에 투영하는 게 된다. (카메라 만년필설, 작가의 펜은 영화에서의 카메라이다.) 이 과정은 이미지를 입체로 부풀려 지면에 기록하는 것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떠올린 이미지를 필름에 기록하는 행위다. 이때 영화는 카메라와 스크린 사이의 중립 지대로 설정된 ‘현실’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지울 것인지를 강구하게 된다. 현실은 영화라는 이미지가 스크린에 점착되는 것을 방해하기에 제거되어야 마땅한 유독물질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현실의 시간은 영화의 시간에 이입하는 것을 방해하기에 스크린에서 제거되어야 할 관념이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는 현실의 시간을 철저히 스크린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하지만, 모름지기 시적인 분위기란 감독의 세계가 현실을 거치지 않고 스크린에 곧바로 닿을 때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마틴 스콜세지라는 노감독은 현실의 시간을 영화가 아닌 배우에게로 투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의 영화란 <아이리시 맨>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라는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쓰이니 말이다.


  • 0
4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콜세지가 오랜만에 연출한 갱스터 범죄물로, 그의 초반기를 함께한 로버트 드니로, 조 페시, 알 파치노가 출연한 영화다. 이미 제작 단계에서 미친 캐스팅 소식에 넷플릭스 배급이라는 실망적인 뉴스에 디에이징으로 인한 개봉 연기까지, 스콜세지라는 이름 하나 만으로도 모든 영화 팬들의 기대를 받을 영화에 대한 내 호기심은 정말 하늘을 뚫었다. 그리고 '아이리시맨'은 '좋은 친구들' 같은 역사에 남을 마피아 범죄 영화들을 만든 감독이 어쩌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최후의 마피아물로 남길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조폭과 범죄 조직 관련 영화들은 자주 범죄 미화라는 딱지가 붙기도 한다. 비록 주인공들의 행동과 결말이 긍정적이지 않을지언정, 이들의 정신을 높게 사고 있는 어조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세계'에서 이정재의 타락이나 황정민의 잔혹한 죽음이라는 결과는 범죄의 비인간성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부라더" 정신과 폼나게 죽는 뭔가 멋있는 모습들도 있지 않나. 이는 미국의 마피아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작은 범죄로 시작하는 양아치들이 조직의 계단을 오르며 나라를 뒤흔드는 간부나 보스가 돼가고 결국 자아와 편집증에 의해 자멸하는 패턴을 가진 이 서브장르의 틀은 '대부' 시리즈에서 완성이 됐다시피 하며, 그 이후에 지금까지도 모두 그 틀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아이리시맨' 또한 그 틀 안에 존재하는 영화지만, 그동안 나온 수많은 마피아 영화들 중에서 주제적으로는 가장 단호한 톤을 가지고 있다.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처럼 화려한 마피아물들을 한때 만들며 커리어를 쌓아올린 감독이지만, 이제 장로 거장이 된 스콜세지는 자신의 작품들을 한번 되돌아보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시기를 함께한 배우들을 다시 소집하여, "의리"와 "가족애"로 단결한 범죄조직의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순과 범죄로 모든 것을 얻는다는 허상에 빠진 사람들이 그 허상에서 깨어나올 때 깨닫는 엄청난 외로움과 비참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그 의미에서,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 최후의 마피아 영화가 될 것 같다.

로버트 드니로, 조 페시, 알 파치노가 모두 연기가 훌륭한 것은 뭐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 작품을 위해 은퇴를 번복한 조 페시는 말할 것도 없고, 배우로서 전성기는 확실히 지난 드니로와 파치노가 거장과 다시 뭉치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은 영화 팬으로서는 정말 감동이었다. 이들의 존재감에서는 여전히 살인적이고 압도적이면서 매력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져서 도저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이들의 표정에는 언제나 의심과 우울과 불안이 묻어있어 영화의 주제의식을 계속 전달하고 있다. 거사를 치른 후 술과 마약과 여자에 쌓여 파티하는 씬들은 짧게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듯하지만, 그 행복이 얼마나 허상적이고 불안정한지가 주연들의 대화와 목소리에서 느껴지고 조연진들에게서 보여졌다. 조연들도 정말 캐스팅이 미쳤다는 점도 하나의 관전 포인트였다. 레이 로마노, 바비 칸나발레, 제시 플레몬스, 안나 파킨에 하비 카이텔까지... 진정한 범죄의 서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디에이징 얘기도 하자면, 이런 최신 기술에도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런 최고의 연기를 온전히 반영해주며 감독의 비전을 이뤄주는 기술력에도 놀랐다. '제미니 맨'의 디에이징 기술이 가장 야심차고 수준 높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완성된 결과물은 이 영화의 기술이 아닌가 싶다. 물론 처음에는 약간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사실 이는 관객으로서 이게 디에이징된 배우라는 것을 인지하고 봐서 그런건가 싶은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디에이징이 전혀 방해가 안 되고 그냥 젊은 모습의 배우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상급 마피아물들을 만든 감독이 늙어서 다시 젊은 시절의 작품들을 되돌아보는 영화인 만큼, 늙은 배우들을 젊은 대역들로 바꾸기보단 제작비를 더 쓰고 개봉도 연기시켜서 까지도 이 기술을 쓰려고 했던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에 상응하는 좋은 결과물도 나왔으니 70대 후반 영화감독의 기술 친화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기술의 능력과 한계도 알고, 단순히 그 기술을 쓰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게 아니라 영화를 위해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기용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비전을 실천하는 노장의 멋있는 장인 정신은 정말 감동적이다.

스콜세지 영화답게 매 씬의 분위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증폭해주는 삽입곡들도 훌륭했고, 델마 슌메이커의 날카롭고 화려한 편집에 찰진 대사들까지... 그야말로 스콜세지라는 거인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샌디 파월의 의상에 시대를 풍성케해주는 프로덕션 디자인까지, 마틴 스콜세지는 어찌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시네마"의 어벤져스와도 같은 제작진을 통해 요즘에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어보이는 3시간 30분 가까이 되는 대서사극을 연출했다. 그 시도와 야심과 결과물에 대해서는 정말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 러닝타임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주인공이 상당히 수동적이고 애매모호한 캐릭터다. 이는 범죄와 폭력의 허무함과 비인간성을 표현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고, 오히려 수동적인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후반부에서 더욱 강력한 임팩트를 남기는 케이스라고 본다. 하지만, 그 수동성 때문에 긴 러닝타임이 꽤 루즈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조 페시로 대표되는 마피아와 알 파치노의 지미 호파라는 두 절친 겸 은인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드니로의 프랭크 시런의 모습에서 상당한 몰입감이 있긴 했으나,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좀 늘어지긴 했다.

"시네마" 논란으로 화제가 된 마틴 스콜세지의 발언들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느 쪽 사람이던 이 영화를 보면 스콜세지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영화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못하고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스콜세지마저도 넷플릭스를 통해나마 개봉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스콜세지는 자신의 언어로, 그리고 영화의 언어를 통해 사장 논리에 의해 사장되고 있는 영화 문화, "시네마"에 대해 관객에게 토론거리를 던졌다. 덤으로 수작을 만들면서 말이다.


  • 0
4.5
'아이리시맨' 간단 리뷰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미국영화에서 분명 갱스터 영화가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당연히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가 그 정점(혹은 시작)을 찍었고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도 그 시대의 어딘가에 있었다. 그리고 마틴 스코세이지가 만든 몇 개의 영화들도 갱스터 영화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다.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카지노' 등은 그의 대표적인 갱스터 영화다(여기에 '갱스 오브 뉴욕', '뉴욕, 뉴욕' 등을 포함해도 좋다). 마틴 스코세이지를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갱스터' 말고 하나 더 언급할 것이 있다. '뉴욕'이다.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한 곳이자 여러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곳이다. 그리고 뉴욕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뮤즈와 같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갱스터 영화만 만든 것은 아니다. 당연히 뉴욕을 배경으로만 영화를 찍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뉴욕'과 '갱스터'다. 만약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세계를 결산하는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작품이 나와야 할까? 당연히 뉴욕의 갱스터들 이야기다.

2. '아이리시맨'은 50년대부터 현재까지 뉴욕 뒷골목에서 페인트공(마피아들의 은어)으로 지낸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처럼 병원에서 요양 중인 프랭크가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트럭 운전수로 지내는 프랭크는 운송하던 고기를 빼돌렸다는 이유로 회사에 고소를 당한다. 이때 도움을 받은 변호사 빌 부팔리노(레이 로마노)와 가까워지면서 그의 사촌 러셀(조 페시)과도 가까워진다. 러셀은 지역 내 여러 사업에 관여하는 큰 손이고 프랭크는 그의 굳은 일을 돕게 된다. 그러다가 러셀의 소개로 화물운송노조위원장인 지미 호파(알 파치노)와 알게 되고 그의 일을 도와주게 된다. 러셀과 지미는 가까운 듯 하지만 경계를 한다. 둘의 묘한 관계 사이에서 프랭크는 갈등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3. 이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할 수 있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실제사건인 지미 호파 실종사건이다. 그는 미국의 화물운송노조위원장이자 노동 운동가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인물이다. 영화 속 내레이션대로 그는 대통령 다음으로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실종사건이 영화의 핵심이라면 이 영화는 간단하게 끝날 영화였다. 그러나 지미 호파 실종사건은 영화의 핵심이 아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프랭크다. 때문에 그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영화는 많은 부분을 할해한다. 당시 마피아와 노조가 권력을 쥐고 있던 50~60년대 미국 정치사를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영화만 봐서는 쉽게 따라가기 어렵다.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도 해봤지만 결국 이 영화는 프랭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용없게 된다. 이 이야기는 마피아와 노조의 권력싸움 사이에 놓인 프랭크의 이야기다.

4. 그렇다면 '프랭크'라는 인물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에서 전투를 한 적이 있으며 우직한 다혈질이다. 성격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으나 누가 딸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쫓아가서 박살을 내놓는 성격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는 러셀의 페인트공이었으나 지미의 신임을 얻으면서 노조 지부장까지 지내게 된다. 러셀과 지미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서 프랭크는 아주 바빠진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을 전해야 되고 설득도 시켜야 된다. 흡사 '아수라'의 한도경(정우성)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만큼 처절한 상황은 아니다. 그는 묵묵히 양 측을 설득하며 틀어진 두 세력을 봉합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프랭크는 신의가 두텁고 충성스런 사람이다. 자신과 관계를 쌓은 보스를 쉽게 배신하지 못한다. 그에게 그런 성격은 천성에 가깝다.

5. 앞서 언급했 듯, 이 영화는 프랭크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다. 이야기가 끝나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 프랭크는 혼자서 걷지도 못하고 약도 챙겨먹지 못하는 노인이 돼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이 정작 딸들과의 관계는 멀어졌다. 경찰들은 "이제는 지미 호파 실종사건의 진실을 말해도 되지 않냐.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러셀과 안젤로(하비 케이틀), 면도날(바비 카나발레), 토니 살레르노(도미닉 롬바르도치) 등은 모두 늙어서 죽고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부님 앞에서도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끝까지 지키는 신의, 마피아들의 의리라고 말하던 그것은 이제 허망한 옛날의 것처럼 느껴진다.

6. 프랭크는 요양원 안에서 옛날 사진들을 보면서 가족과 과거를 추억한다. 그의 시대에 대단했던 인물인 지미 호파는 현재 미국 젊은이들에게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 정도다. 그는 여전히 자녀들과 화해하지 못했고 의미없는 비밀을 지킬 뿐이다. 화려하게 시대를 누볐던 프랭크에게 주어진 공간은 억지로 열어놓은 문 틈 사이의 작은 공간뿐이다. 갱스터 영화의 엔딩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허망하다. 이 엔딩에는 어떤 극적인 것도 없다. 정확히는 극적인 것을 일부러 배제한 모양새다. 사실 갱스터 영화에서 극적인 요소를 주는 방법은 주인공이나 그의 최측근이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대부분 늙어죽거나 늙어 죽기 직전까지 살아있다. 죽어서 멋있는 엔딩이 아닌 살아서 허망한 엔딩인 셈이다.

7. 이 엔딩을 통해 영화는 수많은 세기의 영광을 벗겨낸다. '뉴욕'과 '갱스터'로 대표되는 마틴 스코세이지 자신의 필모그라피 속 영광과 케네디 시대의 풍요를 벗겨낸다. 더 나아가 이민자와 총기(=범죄)로 쌓아올린 미국의 풍요도 벗겨낸다. 이민자의 나라는 세계 최강대국이다. 이 나라에는 많은 우방이 있다. 그러나 그 우방은 언제고 사라질 허망한 것들이다. 언젠가 그들이 사라졌을 때 남은 것은 스스로 들어갈 관을 짜맞추고 문틈 너머 들어올 죽음을 기다리는 늙고 허망한 자신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3시간동안 뉴욕 속 이민자 갱스터의 성공을 보여준 모양이다. 이것은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을 연상시킨다. '더티 해리'로 대표되는 영광의 매그넘 시대를 스스로 끝내버린 노인과 마찬가지로 마틴 스코세이지도 그 영광을 끝내려 한 모양이다.

8. 이렇게 말을 했지만 영화는 끝내주는 몰입감을 자랑한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한 남자의 인생을 보는 맛이 있고 그 인생을 만들어내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맛도 있다. 로버트 드니로, 조 페시, 알 파치노, 하비 케이틀 등으로 이어지는 '연기 거장'들의 향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를 완벽하게 만든다. 특히 자신이 돋보일 때와 조화를 이뤄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연기는 감동스러울 지경이다. 넷플릭스라는 게 핸디캡이 아니라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주연상 유력후보라는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도 장담하기 어려운 수준이다(나는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보다 '아이리시맨'의 로버트 드니로 연기가 더 좋다). '아이리시맨'은 진정한 고수들의 향연이다.

9. 결론: 난해한 미국 정치사를 공부하고 간다면 더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프랭크의 삶에서는 늙어버린 가장의 모습도 보이는 만큼 한국의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한 남자의 삶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이 영화는 '대부'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로 대표되는 미국 근현대사에 종말을 선고한 영화다(그런 영화들에 종말을 선고할 수 있는 사람은 마틴 스코세이지 정도다). 그렇기에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은 어쩌면 이 영화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어제의 용사들을 잔뜩 모아놓고 새로운 시대를 이야기한다. 지미 호파도, 케네디 대통령도, 마피아도 모두 잊혀진 새로운 시대.


추신) 최근 마틴 스코세이지가 마블 영화들을 두고 한마디씩 한 모양이다. 내가 아는(=내가 본 영화들을 만든) 마틴 스코세이지는 오래된 시대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람이다. 그는 늘 새로운 시대에 관심이 있었고 그 때문에 현재에도 도태되지 않고 거장으로 남아있다(20세기의 거장들 중 도태된 사람을 많이 봤다). 그는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에도 '시네마'가 이어지길 바라는 듯 하다. 영화가 줄 수 있는 무한한 즐거움과 매력이 CG액션과 '체험'에 국한되지 않기를 바라는 듯 하다. 히어로 영화가 세계 영화산업의 주류가 됐지만 그래도 '영화'는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작가들은 시대와 인간을 고민할 것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풍부하게 낼 것이다. 거기에는 과거를 빌어 현재를 바라본 마틴 스코세이지의 공도 크다.


  • 0
5

스콜세지 영화를 보게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그의 영화가 이 영화라는 게 안 믿겼다. 보통 혼자 영화를 보러 가면 엔딩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데,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단 그냥 그래야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말 엔딩크레딧이 다 끝나도 자리를 떠나기가 싫었다. 이 영화조차 그저 한 편의 영화가 되어버릴 저 바깥 세계로 나서기가 싫었다.

난 영화를 언제나 너무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시네마의 영역이라는 것. 그것만큼은 마음으로 느껴졌다. 뉴욕과 갱스터. 거리와 구원. 종교와 영화. 캐네디와 닉슨. 러셀과 지미 호파.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사이에 끝까지 살아있던 프랭크 시런이 있었고 영화가 있었다. 스콜세지가 있었고 드니로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세계관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마 이제 드니로가 등장하는 스콜세지의 뉴욕 마피아 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이런 한 거장의 시대 끝에, 가까스로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게 왠지 작은 축복이자 작은 저주 같기도 하다. 내가 저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세계엔 어떤 영화가 만들어지고 어떤 배우와 감독이 늙어가고 있을까? 그때도 시네마는 계속되고 있을까?


(스포일러를 포함해요)


그런데 그런 영화가 이렇게 문 틈을 열어놓으며 끝난다니. 영화는 시네마의 영역을 우리에게로 확장시켰다. 논란이 된 마블 관련 발언과 글에서 스콜세지는 현 영화 산업의 세대를 개탄했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시네마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는 믿음. 그것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듯해서 자꾸만 그 안을 기웃거리고 싶어졌다. <아이리시맨>은 역시나 영화에 대한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

스콜세지의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인물에 대한 시선이다. 특히나 도덕률을 자유로이 지워버리며 조직과 노조 세계에 빠져드는 프랭크 시런을 보는 페기와 카메라의 시선. 처음 페기가 영화에 등장했을 때 프랭크는 그녀를 데리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잔인한 보복을 행했다. 그때부터 페기의 눈은 끈질기게 프랭크를 향했다. 처음에 그건 관객의 눈과도 같았다. 그런데 지미 호파가 등장하며, 페기의 눈과 관객의 눈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페기는 지미 호파를 좋아하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선량하지만은 않은 기운을 자꾸만 느낀다. 그는 어딘가 마피아 같고, 다혈질이며, 닉슨을 지원했고, 사기죄로 감옥에도 갔다. 그러면서 프랭크는 본격적으로 러셀과 지미 호파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이 된다. 그때부터 페기의 시선은 그녀의 성장과 맞물려 그 빈도가 낮아진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 역시 프랭크가 처음 범죄를 저지르던 때보다 더욱 편안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심지어 프랭크 시런을 위한 만찬회가 열린다. 겉보기엔 평화로운 만찬회는 실은 러셀과 지미 호파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로 향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만찬회에서 처음으로 프랭크와 페기 사이의 시선이 역전되는 장면이 나온다. 개인을 위한 만찬회가 열릴 만큼 잘 살아온 것만 같은 프랭크와, 그날만큼은 그를 뿌듯하게 바라보는 가족들. 좋아하는 지미 호파와 춤을 추는 페기는 그전까지의 눈빛과는 한결 다른 천진한 눈으로 아버지를 본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그녀를 보는 프랭크의 근심어린 표정. 이 표정은 이미 나중의 비극을 예언하고 있었다. 영원한 중재자의 운명을 가질 수는 없던 프랭크. <좋은 친구들>이 '1980년 5월 11일'의 헨리 힐을 따라가며 그가 몰락하는 과정을 이 하루에 담아냈던 것처럼, <아이리시맨>은 프랭크가 지미 호파를 죽이는 날의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그날 이후 프랭크는 모든 걸 잃는다. 친구들과 그는 모두 감옥에 들어간다. 세월의 풍파로 영광의 날은 바스라진다. 페기는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남은 구원의 가능성 역시 너무도 허무하게 그를 조망할 뿐이다.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오직 카메라. 영화가 된 그로서만 프랭크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남은 건 열린 문 틈으로 그를 보는 우리의 시선 뿐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