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The Favourite

97.75%
3.9


지금 여기서 감상

대여

구매


작품 정보

절대 권력을 지닌 히스테릭한 영국의 여왕 ‘앤’(올리비아 콜맨).
여왕의 오랜 친구이자 권력의 실세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와
신분 상승을 노리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욕망 하녀
‘애비게일 힐’(엠마 스톤)은 여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치기 시작하는데…

예고편


감독/출연

요르고스 란티모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올리비아 콜맨
올리비아 콜맨
엠마 스톤
엠마 스톤
레이첼 와이즈
레이첼 와이즈
니콜라스 홀트
니콜라스 홀트
조 알윈
조 알윈
마크 게티스
마크 게티스
제임스 스미스
제임스 스미스

리뷰

97.75%의 좋아요 평가를 받은 작품입니다.

2% 98%
5
인간의 이성을 벗겨내며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인간에 대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반형이상학적 접근

그리스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인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매 작품 인간을 어떤 특정 시스템에 가둬놓고 현대사회 속에 숨어있던 인간의 특성을 사유하는 작업을 즐겨한다. <송곳니> (2009)에서는 인간의 성장을, <더 랍스터> (2015)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본성을, 그리고 <킬링 디어> (2017)에서는 가족 자체를 시스템 안에 통제하면서 감춰진 현대인의 실질적인 모습을 끄집어내기 위해 심오하게 접근한다. 제75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2018)도 마찬가지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만의 시스템론에서 벗어나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전작 <킬링 디어>와 달리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인물들에게 감정이 소거된 듯한 톤을 허용하지 않지만, 평균치가 없는 극단적인 목소리 톤을 허용함으로써 인물들의 부자연스러운 언행을 유지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최대한 통제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로우 앵글 쇼트(low angle shot)와 와이드 앵글 쇼트(wide angle shot)에 감금함으로써 인간의 동물성을 드러내며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을 반박하기 시작한다.

1. 모래시계 형태의 집단과 카메라 앵글이 만들어낸 실질적인 궁전

<킬링 디어>는 가족을 일종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여긴다. 그래서 주인공 '스티븐(콜린 파렐)'의 가족으로부터 혈연의 정을 소거하고 건조하게 그려냄으로써 가족을 피라미드 형태를 닮은 수직적 계층의 집단으로 묘사한다. 이와 달리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절대 권력을 지닌 영국의 여왕 '앤(올리비아 콜맨)'을 중심으로 상단부에는 권력의 실세 '사라(레이첼 와이즈)'와 신분 상승을 노리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애비게일(엠마 스톤)'을 배치하고, 하단부에는 '할리(니콜라스 홀트)'를 포함한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일부 남성 관료들을 배치함으로써 모래시계 형태의 집단을 완성한다. 이들은 철저하게 궁전 안에 묶여있는데, 여기서 궁전은 피사체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과 주요 피사체를 작게 보여주는 대신 주변 배경을 화면에 넓게 등장시키는 와이드 앵글로만 쌓아 올린 추상적인 공간으로 변형된다. 분명 '앤'이 머무르는 궁전은 넓지만, 전반적인 구조와 세부적인 궁전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물리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대신 로우 앵글과 와이드 앵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물들의 행동반경을 좁혀가며 답답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이는 심리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앤'을 포함한 극 중 등장인물들이 공간 안에 갇혀 있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관객과 인물들 간의 거리를 유지하는데 노력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성이 철저하게 통제된 이들의 원시적인 동물성을 점차 보여주되 인물의 표정을 명확히 알 수 없게 하는 롱 쇼트(long shot)와 아이룸(eye room)이 전혀 확보되지 않은 쇼트를 중간중간 적절히 활용하면서 관객이 인간의 본질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 내리는 형이상학적 관점을 비판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주체적으로 탐구하도록 유도한다. 더 나아가, 얼굴을 제외한 모든 주변이 어두운 장면이 종종 쓰이는데, 이 또한 관객의 능동적인 탐구 및 관찰 자세를 이끌어내기 위함과 연관 있다. 여왕의 침실로 가기 위해 어두운 통로를 지날 때나 감정의 양극단을 오고 갈 때마다 인물들의 얼굴은 어둠에 둘러싸인다. 어두워서 얼굴 주변을 명확하게 알 수 없을뿐더러 공간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순간 관객은 인간성이 곪아 터져 가는 과정을 반추하면서 인간의 동물적 특성을 자주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2. 서서히 드러나는 인간의 폭력성과 동물성

'사라'와 '애비게일'이 여왕 '앤'의 환심을 사고 총애를 한 몸에 받기 위해 점점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일수록 두 사람을 포함해 모래시계 형태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폭력적인 면과 동물적인 면을 하나둘 드러내기 시작한다. 질투심이 발동하게 되면 이들은 타인에게 가학적인 체벌을 가하거나, 총으로 위협하거나, 혹은 책을 의도적으로 상대를 향해 던지며 폭력성을 표출한다. 심지어 질투심에 위장된 나약함이 더해져 누군가를 살해하려고 해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특히, 이성이 소거된 인간의 파괴적인 면모가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은 비둘기를 향해 사격하며 쾌락을 느끼는 장면이다. 사냥총으로 비둘기를 저격하는데 실패했지만, 그만두지 않고 웃으면서 다시 시도하는 태도는 윤리적 판단 기능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의 원시적인 동물성도 함께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본인의 개인적인 공간에서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은 문제로 삼을 수 없지만, 공개적인 장소에 사림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동물적인 본능에만 충실하며 섹스를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를 동물성의 영역 안에 국한시켜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욕구를 참지 못하고 성관계를 하기 위해 숲 속을 뒹굴 뿐만 아니라 사리 분별을 못하고 아무 곳에서나 헤벌레 웃으면서 자위를 하는 모습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근데, 이런 특징은 궁전 안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남성 관료와 나머지 남성 관료가 장난을 치는 장면에서 극심하게 묘사된다. 전쟁으로 인해 국외 정세는 악화되고, 전쟁을 위해 더 많은 조세를 거둬 민심이 악화되는 상황에도 관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나체로 서 있는 대상에게 토마토를 던지면서 더러운 쾌락을 누린다. 따라서, 이들의 모습은 동물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3. 인간의 본질을 반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한 궁극적인 목적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통해 인간의 이성을 고의적으로 통제하고, 이와 같은 가정된 시스템 안에서 인간의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특성을 과감하게 들춰냈다. 후반부에 도달했을 때 관객이 각별히 주목해야 하는 인물은 여왕 '앤'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앤'의 육체에는 통풍으로 인한 상처가 덧나기 시작하고 그녀의 감각기능은 마비되어 가는데, 이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형이상학적으로만 접근했을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종을 울린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이성을 지니고 있기에 동물과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오로지 형이상학적 관점에 따라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만 규정한다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은 비판적인 사고 없이 당연하게 여겨지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인간성에 대한 사유는 먼 훗날 중단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깨우치지 못하는 미래의 비극을 경고하기 위해 이번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은 경고에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여러 토끼의 잔상들로만 가득 찬 엔딩 장면처럼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지 모른 채 동물성의 영역 안에서 갇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 1
5

오랜만에 보면서 깔깔 웃고 눈물 질질 흘리고 감탄하면서 본 영화.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 다 때려박은 영화가 바로 이런거? 인간의 욕망을 바닥 끝까지 다 보여주고, 그 욕망의 행동들을 다 더럽게 연출해낸 게 너무 맘에 들었다. 자칫해선 겉핥기 식으로 연출해서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인간의 욕구를 적나라하게 표출해내서 좀 불편하고 충격이었달까,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그걸 노렸고 완전 성공적이었다. 후.. 게다가 권력을 쥐고 있는 여왕 앤이지만, 사실상 실세는 앤의 친구인 사라. 어떻게 보면 무능한 권력을 풍자한 셈이다. 게다가 18세기의 남녀 역할이 바뀐 듯 여자들이 정치/권력의 대부분을 결정하고, 화장이나 하고 있는 남자들ㅋㅋㅋㅋ과 여장부처럼 거친 성격인 사라, 평생 하녀로 살 뻔했다가 영리하고 꾀가 많아 권력을 차지하는 애비게일까지. 와 이거 진짜 대박인데?? 어쩌면 앤 여왕의 눈엔 사라와 애비게일이 자신의 힘을 받으려고 싸우는 게, 자신의 손 안에서 노는 토끼들 처럼 보였을까. 근데 또 여기서 끝이 아님. 올리비아 콜맨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니까 더욱 납득이 갔던... 앤 여왕이 사라와 그의 남편이 춤을 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이 있었는데 진짜 너무 외로워 보였다. 또 히스테릭한 연기들, 애 같고 뻔뻔하고 감정적이고 통제불능인 여왕의 모습을 연기했다. 미쳤던데;; 한 영화에서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는 게 쉬운 게 아니야. 근데 솔직히 상영등급이 15세인데ㅋㅋㅋㅋ;;; 아니야 이거ㅠㅠ... 19세야.....


  • 0
4
토끼는 토끼장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앤 여왕은 죽은 17명 자식들의 이름을 붙인 17마리 토끼를 기른다.애비게일은 사라와 달리 그 토끼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앤의 호감을 산다. 이 영화는 몰락 귀족은 애비게일이 앤 여왕의 총애를 받는 사촌 언니 사라의 자리를 빼앗고 권세를 얻는다는 스토리로 요약할 수 있다. 스토리로 보면 중반부부턴 전형적인 치정극이다.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드는 초반의 미술과 촬영에 익숙해지면 그 뒤로는 사라든 애비게일이든 어느 한 쪽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결말이기에 조금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사라와 애비게일 두 사람은 사라의 말을 인용하면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 사라와 앤의 관계는 애비게일과 앤의 관계와 다르다. 사라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휘두르고 애비게일은 권력을 얻기 위해 사랑을 가장한다. 사라는 앤의 상처를 즐거움으로 감싸려하지만 애비게일은 그 상처를 노출시키고 자신이 그것을 매만짐으로써 사랑을 얻는다. 사라의 마지막 편지는 여왕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 보낸 자신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애초에 애비게일에게 전달될 편지였으니까. 애비게일이 권력을 위해서 자신과 앤을 어떤 상태로 몰아넣었는지 느끼게 만드는 편지였을 것이다. 애비게일이 궁극의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 앤은 왼쪽 다리뿐 아니라 좌반신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고 토끼들은 토끼장을 벗어나 마음대로 침실을 뛰어다닌다. 풀려난 상처와 고통들을 언제까지 거짓으로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권력을 얻기 위해 사랑을 가장했다면 유지하기 위해선 언제까지 그것을 계속해야할까?
시대 배경이 비슷한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을 생각나게 만드는 미술과 촬영, 조명은 2시간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올리비아 콜먼-레이첼 와이즈-엠마 스톤의 삼각편대가 환상적인 연기로 매혹시킨다.


  • 0
3
언어와 언어가 아닌 세계 : 요르고스 란티모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어와 언어가 아닌 세계 : 요르고스 란티모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그리스의 영화감독인데, 2015년의 <더 랍스터>부터 영어로 영화를 찍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이 요르고스를 <더 랍스터>로 처음 접한 듯하다. 그런데 <더 랍스터>로 요르고스를 처음 접한 이들은 영화의 기괴함에 깜짝 놀라게 된다. 짝이 없으면 동물로 변해야 하는 설정의 영화 속 세상에서, 솔로 수용소로 끌려온 주인공은 자신의 최후로 랍스터를 점찍는다. 이유는 간단한데, 랍스터는 수명이 없기 때문이다. 텔로미어라는 유전자 끝자락의 노화 물질을 억제하는 랍스터에게 죽음이란 그저 사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사고는 어떤 것인가. 늙은 (나이가 많은) 랍스터는 갑각류의 특성상 껍질을 계속 벗게 되는데, 어느 순간 힘에 부쳐 껍질을 벗지 못하게 되는 시기가 오면 그대로 ‘사망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죽음은 병이라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닌, 삶의 무게에서 오는 압력이 주된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는 것, 늙지 않음에도 늙음(나이)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랍스터의 은유에서 우리가 찾아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시선이다. 내 기준으로 보기에 한심해 보이는 타인의 행동은 사실, 유전자라는 태초의 설계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하는 요르고스는 이 영화에서 강아지를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그러니까 그는 그 유전자를 통해 우리가 이성으로 설명하는 무언가는 사실 본능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그러나 그런 설명을 거부하는 자신의 모습을 주목하려 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그 강아지는 본디 주인공의 형이었었는데, 동물로 변한 지금에는 그냥 강아지로만 보일 뿐이고, 매번 혓바닥을 내밀며 좋다고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모습에 싫증을 낸 상대 여자가 강아지를 ‘살해’한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동물로 변한 사람들이 ‘사람’이었다는 자각은 언어로만 남아있고, 언어를 제한 몸으로는 그저 동물로만 보일 뿐인 셈이다.



정리하자면 요르고스는 언어와 언어가 아닌 세계가 한 몸에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이 공존은 영화의 전반이 아닌, 인물 자체에 깃들어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그러니까 대런 아르노프스키나 (<블랙스완>) 곤 사토시 (<퍼펙트 블루>)가 거울의 은유를 통해 자신의 몸에 깃든 두 가지 인격, 그 이중성을 탐구했다면, 요르고스는 홍상수나 에릭 로메르의 세계를 신화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홍상수의 영화에서 언어에 우선하는 신체의 이미지, 그 배반적인 행동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의미가 <생활의 발견>이 아닌 신화의 형태로 맞닥뜨리는 게 요르고스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요르고스 영화는 거의 해석이 불가능하다. 본래 정답이란 게 없는 영화의 의미체계를 붕붕 돌려 주변에 감싸버리는 게 그의 방식이기에, 어쩌면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이해 가지 않는 인물의 행동 양상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요르고스의 영화 속이기에 우리는 늘 망설이게 된다.



<더 랍스터>에 이어 <킬링디어>를 보았다면 알겠지만, 요르고스의 영화에는 직접적으로 암시되는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조립한 영화의 미장센은 일차를 거쳐 이차의 순번으로 변환을 거쳐야 한다. 그건 마치,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승압 과정을 거쳐 가정에 전달되는 것과도 같다. “전기는 국산이지만 원료는 수입입니다.”라는 한국전력공사의 옛 캐치프레이즈처럼, 개인적으로 영화는 해석하는 자세로 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해석은 주관이지만 증거는 영화에서 수입해왔다 = 해석을 아껴써야 한다), <킬링 디어> 같은 영화를 보면 무언가 들여다보고 파헤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의 논리를 구축할 구체적인 단어와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하지만 심리적인 유인은 있다. 이른바 성서에서 등장하는 여러 알레고리, 하지만 그게 정말로 알레고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레고리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심증(의심)만으로 풀어나가는 이 영화의 해석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분위기에 심취하게 하고, 그 자장 안에서 원인모를 힘에 이끌려가게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주 같은 것이다. 퍼즐을 조합하면서 오는 추상게임이 아니라, 그림에서 인상을 받는 ‘캐치마인드(상대방이 그린 그림을 보고 무슨 단어인지 맞추는 게임)’에 가깝다. 이런 설명이 다소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영화는 논리로 설명하는 것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교차하는 이야기, 벽에 막히는 이야기, 돌아가는 이야기



그런데 요르고스의 신작인 <더 페이버릿 : 왕의 여자>는 그전까지의 영화와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왜 달라 보였는지를 잘 따져보면 표면상의 이유는 확실했다. 이야기에 논리가 있었다. 세 여인이 나오는 이 영화에는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을 두고 벌어지는 두 여인 (엠마 스톤, 레이첼 와이즈)의 신경전이 벌어지는데, 하녀였던 아비게일(엠마스톤)은 귀족이 되고 귀족이었던 사라(레이첼 와이즈)는 신분의 추락을 겪게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쾌감은 그 두 가지 곡선이 교차하는 모습, 이 그래프의 양 극단을 이해하는 것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이다. X자 형태로 교차하는 두 사람의 운명은 영화를 두 번 보았을 때 더 잘 이해된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히치콕의 <현기증>을 불러오고 싶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에서 요르고스는 카메라를 일부러 광각으로 잡는다. (<현기증>의 그 유명한 장면) 그러니까, <인터스텔라>의 가르강튀아처럼 화면 중앙을 두고 가장자리가 왜곡된다. 이게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건, 광각으로 인한 공간의 왜곡은 왼쪽 오른쪽이 넓은 파노라마를 찍을 때 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1.85 : 1의 아담한 비율이므로 딱히 그걸 써야 할 이유가 없다. 즉, 이 광각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며, 이런 부분에서 관객은 이야기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된다.



왜 멀어지는가. 이것은 영화다. 라고 스스로 말하는 영화에게 몰입한다면 그건 너무 단순한 일일 테다. 오히려 이 광각은 요즘에 나오는 360도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요르고스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중앙에 들이민 후에, 360도로 고개를 돌리는 식의 촬영을 자주 응용하고는 했다. 이것은 마치 관객이 화면 안에 직접 들어가는 체험의 형식을 빌리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말하는 VR, 3D처럼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면 관객이 직접 들어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들어감은 스크린이라는 벽에 막혀 근본적인 침투가 성립하지 못한다. 비유하자면 얼굴에 스타킹을 뒤집어쓴 형태라고나 할까, 이제 다시금 히치콕을 복기하면, 히치콕은 <현기증>의 고소공포증을 표현하려고 새로운 촬영기법을 발명해냈는데, 카메라를 줌하면서 본체는 뒤로 보내는, 줌하면서 멀어지는 식의 특수효과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말하자면 히치콕은 이 기법을 통해서 자살하려는 그녀를 따라가야 하지만 고소공포증에 질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정신은 저곳에 몸은 이곳에 있는 ‘스타킹’을 만들어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의 이성은 감성보다 앞질러나간다. 앞질러 나가기에, 역으로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게 그 카메라고 광각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 영화가 서로를 앞지르려는 두 여인의 질투극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하녀로 들어왔던 아비게일이 앤 여왕에게 아부하면서 지위를 얻고, 그 지위를 얻는 과정을 저지하지 못한 대가로 점점 역전되어가는 권력의 체계에는 ‘피죤 슈팅(비둘기 쏘기)’ 실력이 나날이 높아지다가 끝내 얼굴에 피를 튀기는 아비게일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는다. 이 피 튀김은 거의 영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장면 전까지 오버 렙이 주로 사용되던 영화는 그 후로 오버 렙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까 이때 오버 렙이라는 기법을 앞의 쇼트가 사라지기 전에 뒤의 쇼트를 서서히 떠오르게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앞 쇼트를 앞질러 나가는 뒷 쇼트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런 모습이 일종의 경주처럼 느껴진다면, 그 기법과 광각 카메라를 자의적으로 조합한 관객은 앞 혹은 뒤 쇼트 어딘가로 튕겨 나가게 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가설이다. 오버 렙이 등장하는 장면의 전후 쇼트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것은 자칫하면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그 연관성을 영화 전체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이 영화의 전반과 후반은 중간을 중심으로 X 형태를 이루는데, 반으로 접으면 대략 서사가 들어맞는다. 마차를 타고 궁에 찾아오는 아비게일의 모습이 도입부에 제시된다면, 마차를 타고 궁을 떠나는 사라의 모습은 결말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위기감을 느껴 아비게일을 내쫓으려는 사라를 막아선 앤 여왕의 모습이 등장하는 쇼트는 그 X자의 중심축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때 그 X 축을 만드는 것, 양쪽 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나는 이 힘이 히치콕이 <현기증>에서 응용했던 카메라 기법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요컨대,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고, 벽에 부딪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이 X자 형태는 반으로 접히는 게 아닌, 뒤로 돌아오는 형태이며, 이때 두 여인의 모습은 서로를 앞지르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고는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런 가정은 첫 관람에서 쉽게 보이지 않지만, 대략의 구조를 이해하고 2회차 관람을 시도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다.





육체, 감정, 세 가지 층위



이 영화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세 가지 인물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전쟁이 수도 없이 언급되지만 막상 전쟁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 장면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 또한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줄곧 강조하면서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줄곧 궁 안에만 머문다. 굉장히 답답하고, 간간이 길을 따라나서면서 숲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는 외부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내부를 적극적으로 둘러보는 광각 카메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카메라는 안에만 머물까. 그 바깥에도 사람들은 분명 있다. 전쟁에서 승전보를 알리고 돌아오는 장군의 모습도 영화에서 나타나지 않다가, 끝에 가서야 갑자기 등장한다. 이 부분은 잠시 넘겨두고, 요르고스의 언어와 언어가 아니라는 축조방식에 주목하도록 하자.



생각해보면 요르고스의 영화는 늘 실내가 주된 배경이었다. 그래서 이 물음은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해석은 크게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해석이 아니라 해설을 하면 어떨까. 요컨대 우리는 이 영화에서 세 여인을 보고, 그게 한 여인을 두고 대립하는 두 여인이라는 점, 두 여인이 한 여인과 성관계를 한다는 점에서 결합이라는 용어를 채택한다면, 그 결합은 사실 필연적인 게 아니었을지 생각해볼 수가 있다. 내면의 천사와 악마처럼, 그 두 사람을 통해 요르고스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여왕 앤의 정치적인 고독 그리고 고뇌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 대한 근거는 두 여인의 성향이 정반대라는 앤의 발언에 있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아?”라는 사라를 향한 앤의 발언은 아비게일의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사라는 이때 정직하게 말하는 게 바로 ‘친구’이자 ‘충신’이라고 반박하지만, 오소리같이 생겼다는 말에 질려버린 앤은 사라를 궁에서 추방하게 된다. 그리고 사라를 추방하고 나자 그녀는 귀신같이 쇠약해진다. 이때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추론은 사라가 앤의 건강을 부여잡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어쩌면 사라는 앤의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인 아비게일을 퇴치하는 백혈구였을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 영화에서 거의 마네킹처럼 보이는 야당과 여당의 두 대표가 대립하는 과정이 그런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양측을 대변하는 구도가 여인/정치인이라는 두 가지로 나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음이 나온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시금 첫 문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양쪽 진영의 사람들이 궁 안에 있고, 그 밖에는 힘겹게 싸우는 농민과 군인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궁의 안팎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이들을 설정한다. 이때 영화가 택한 것은 안쪽이고 바깥쪽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때 그 안쪽을 내면으로 바깥쪽을 외면으로 설정하면, 여왕이 겪는 우울증은 안쪽의 달콤한 것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을 테다. 여왕은 단것을 먹지 못해 금방 토해내고, 달콤한 말을 들으면 ‘쇠약해진다’. 이 모습이 그의 정치적 입지 혹은 떠나보낸 17명의 자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궁 바깥에는 돈 때문이든 적 때문이든 죽어가는 이들이 있고, 농민과 군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전장에서 삶을 극복하고 있다. 물론 여왕 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왕족이라는 전장에서 삶을 극복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바깥의 국민을 생각하라는 야당 대표의 말을 듣게 되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도 마음 편하게 춤이나 추고 연회를 즐기고 오리 경주나 하고 있는 사치를 보고 있노라면 그 발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요르고스의 답변은 그들에겐 그 유희와 사치 또한 의무의 한 종류라는 것이다. 요컨대, 국민들을 잘 통솔하면서도 귀족의 품위를 지켜야 했던 군주정의 끝자락인 18세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는 그런 의무가 나돌고 있다. 군인의 의무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고, 농민의 의무는 농사를 잘 짓는 것이며, 귀족의 의무는 품위 있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때 그 안팎을 조리 있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비게일과 사라, 여당과 야당, 궁 안과 궁 밖.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것은 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인 것에 반해, 궁 밖에 있는 일들을 전혀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궁밖에 있는 것을 말하려 하는 이들의 정체 혹은 발언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타당하다.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바깥을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간간히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창 주변의 인물을 보여주기는 해도,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음악대의 연주소리에 버럭 신경질을 내는 여왕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에서 외부는 의도적으로 회피되는 존재 즉 그에 대응하는 것들 또한 의도적으로 회피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영화는 야당(바깥)과 아비게일(바깥에서 온)로 시작하는 것이고, 중간에 X자로 교차하여서 그 바깥을 안쪽으로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것을 불러오는 방법, 요르고스의 선택은 섹스다. 섹스라는 이름의 교접, 교환, 벌이 꽃에서 꽃가루를 추출하듯이 신체를 접촉해야만 무언가가 전달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언어로만 표현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X로 교차하는 담론, 그 담론을 교차하는 것은 여성 대 여성끼리 할 수 있는 체위, 하지만 이때 육체는 닿아도 감정은 도달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 마지막에 편지를 막아서는 아비게일의 행동은 정치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그 (편지)교환은 이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투명한 막의 제시, (이것은 담론의 피임인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 우리를 가로막는 투명한 막, 이 시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금 뒤로 밀려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분명 이것이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여당과 야당은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는 게 정상이고, 그런 면에서 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은 그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글의 가장 첫 문단으로 돌아가면 언어가 아닌 것은 몸이고 언어인 것은 말일 텐데,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면서도 정작 국민들의 혈세로 노름이나 즐기는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몸과 말의 불일치를 느낀다면, 그 양쪽 결정이 교차하는 이 영화의 구조에는 앤 여왕이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0
4
처절한 암투의 끝에서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랍스터>와 <킬링 디어>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입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올리비아 콜맨,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도 이름을 올렸군요. 처음 영화 포스터를 보자마자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일 것 같던 영화였어요. 시대극인데 질투를 주제로 하는 영화라니. 신기하면서도 신박했고, 우려도 되었지만 기대가 더 컸습니다.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덕일지도요)

한 마다로,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는 참으로 당당한 영화입니다. 줄거리에 자신이 없어 에둘러 표현하지도 않고, 연출에 자신이 없어 정면만 응시하지도 않습니다. 정해진 플롯을 따라 똑바로 걸어갑니다. 게다가 연출은 기대 이상(!)입니다. 하나만 꼽자면 여왕과 사라가 함께 지나오던 통로에 여왕이 혼자 있을 때, 드리워진 어둠에 대한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물의 감정에 따라 상황과 연출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 영화는 유머까지 겸비합니다. 시대극인데다 궁에서의 암투를 그린 터라 유머라 해도 별 것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과하지 않은 유머코드를 이야기에 잘 녹여냈습니다. 대놓고 유머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피식 할 만큼의 장치들이 존재하는 것이죠. 마치 여러 장르와 시대극을 섞어 놓아, 퓨전의 느낌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재미도 있고 묵직함도 있으며, 무엇보다 영화의 여러 장치들이 흥미롭습니다.

또한 이 영화를 논하려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다른 주조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저는 콜맨의 연기가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혼란스러운 눈빛, 당당한 눈빛 등 눈빛 연기는 물론 동작 하나하나까지 여왕과 어울립니다. 여러 비극을 겪었던 히스테리 여왕을 연기하기가 분명 쉽지 않았을 텐데도 놀랍게 잘 표현했습니다. <더 페이버릿>의 작품적 성공에는 연기의 힘이 5할입니다.

​두 사람을 자신의 도구라고 생각한 여왕. 하지만 여왕을 도구로 생각하고 접근했던 두 사람.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암투와 두뇌 싸움. '그들을 믿을까 말까'라는 자주적이고 독단적인 선택권을 손에 쥐었다 생각했지만 여왕은 결국 누군가를 선택해도 꼭두각시가 될 노릇입니다. 영화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엔딩으로 향할수록 여왕과 하녀, 사라의 민낯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죠. 그리고 어느새 여왕의 시선으로 시작했던 영화를 하녀의 권력이 장악해버립니다. 한낱 하녀에서 시작된 그녀는 여왕이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알게 되어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선과 악을 단정짓기는 쉽지 않습니다. 초반에는 캐릭터의 선과 악이 분명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정황이 사실인지조차 헷갈리게 됩니다. 이토록 영화에는 엔딩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존재하지만, 예술영화들 중에서는 훨씬 대중적인 블랙코미디입니다. 예술영화들 중에서 '재미'라는 단어를 찾기 힘들었던 요즘 영화계에서, 조금의 단비(?)가 내린 듯한 기분입니다.


  • 0
2.5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추가내용을 덧붙이자면,

궁금했다. 사라가 앤에게 쓴 편지에 뭐라고 썼을지.
전해지지 못했고, 단호한 사라가 몇번이나 고쳐쓴 편지가 그러다 알게됐다. 결핍을 이제야 사라가 느낀다는 것을. 결핍이 있어야 인간인가 라는 성급한 질문과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인간이야말로 진짜 사회적인 동물임을 연달아 유추했다.

사람들은 왜 이 영화가 좋다고 할까?
정교한 세트와 카메라로 만든 세계. 느슨한 분위기와 어찌보면 괴기스러운 인상을 주는 것에 어떤 부분이 좋았을까.
영화에 드러나는 세트, 의상등으로 대유되는 표현주의 라는 것과 감독의 성향이 줄어든 작가주의 사이에서 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제 곧 개봉을 하면 다시 한번 봐야겠다
아직 빨간 불은 나 하나여서 위축된다 ㅠㅠ

——————-
01.
영화는 인물의 관계를 그린다. 절대적인 권력에 의한 것이 중심이 되는데, 그 권력의 주체자들이 사랑과 신분로 서로 얽혀드니 복잡하게 보여진다.

02.
특이하게 중심인물을 바라볼때에는 화면 왜곡이 없는 렌즈를 통해 프레임을 채우는데, 그외의 것을 담을때 화면에 왜곡이 일어난다. 왜일까.
사라의 편지를 보고 에비게일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말버리 부인(사라)은 왜 편지에 ‘늘 감사하다’고 썼고, 전체적인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카메라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에 비해서 밀도높게 관객을 몰고 가는 느낌은 없어서 편하게 관람은 할수 있다. 그러나 궁금한 지점이 굉장히 많이 발생한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