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5.0

이상한 나라의 그레타 거윅

그레타 거윅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원작 <작은 아씨들> 속 시간을 뒤엉키게 하며, <작은 아씨들>을 쓰는 작가 조(시얼샤 로넌)의 성장기를 찍는다. 감독은 전작인 <레이디 버드>에서도 시얼샤 로넌을 캐스팅해 크리스틴이라는 한 여성의 성장기를 그려낸 이력이 있다. <레이디 버드>가 레이디 버드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 인정하고 뉴욕에 있는 대학교에 정착하기까지의 성장담이라면 <작은 아씨들>은 익명으로 글을 발표하던 조가 작가 "조 마치"로 책을 출판하기까지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다. 똑같은 배우의 차용은 이 두 영화를 하나의 연장된 작품으로 보게끔 만드는 착시효과가 있다. 크리스틴의 성장을 보여주려 계속 앞으로 달려야만 했던 <레이디 버드>가 시간을 선형적으로 배치한데 비해 <작은 아씨들>이 시간대를 뒤엉키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조가 소설을 쓴다는 점에서 찾아낼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을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까.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에 쫓겨 숨가쁘게 달려온 레이디 버드가 조로 성장해 무엇이 자신을 성장하게 했는지 반추하면서 소설을 써가는 과정을 다루는 영화라고. 두 영화가 별개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레타 거윅의 자서전으로 읽히기에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작품의 차이는 두 작품이 만들어진 환경의 변화가 있다. <레이디 버드>가 인디 진영에 있던 그레타 거윅의 데뷔작이었다면, <작은 아씨들>은 상업 진영에 있는 그녀의 데뷔작이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누군가를 위로해주지도 않는 그의 영화는 필연적으로 변했어야 했다. 이 영화를 물론 "매 순간을 기쁘게 싸워나갈"것이라 다짐하고 "내 꿈이 네 꿈과 다르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페미니즘 영화라 정의내릴 수 있다. 할리우드가 요구하는 스펙터클한 영화의 기준을 거부하며, 개개인을 비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모든 여성의 삶을 응원하고, 매 순간 일상이 투쟁이자 기쁨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미스터리다. 장르 문법을 끌어들인 영화다. 로드무비에 가까운 <레이디 버드>와 달리 <작은 아씨들>은 그 내부에 미스터리의 요소를 삽입한다. 그레타 거윅의 트릭은 조가 쓰는 소설이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명확히 하지 않은 데에서 온다. <작은 아씨들>은 이를 흩뜨리려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할 것이라는 신호도 주지 않은 채 급작스레 플래시백을 해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다. <작은 아씨들>이 단순히 독신주의자인 조가 복원해낸 네 자매(조, 메기, 베스, 에이미)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긴장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관객과의 게임을 벌인다. 고전을 틴에이지 문법으로 재해석한 평작에 그칠 수 있던 이 작품은 메타-픽션 식의 각색과 거친 편집으로서 그 단점을 극복해낸다.

카메라는 무인칭, 현재 시점이고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것은 그곳에 있는 고유한 이미지다. 즉, 우리가 영화라 묶어서 지칭하는 것들은 일련의 숏들을 다발로 묶어놓은 것에 불과하고, "대상들의 배열이 사태를 형성한(비트겐슈타인)"다고 볼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이 시퀀스를 흩뿌려놓고, 그것들을 배열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작은 아씨들>이 시간대를 흩뜨려 만드는 것은 어느 장면이 어느 장면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이며, 그 긴장감은 미스터리를 발전시킨다. 모든 사실을 흩뿌리고 마지막에야 그들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아씨들>은 첫 시퀀스에서 네 자매는 각각 누군가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 순간 만난 누군가와 끝내 사랑에 빠지고 만다. 조가 현재 시점에서 프리드리히와 커플로 발전하는 과정을 따라가보면 다음과 같다. 1. 뉴욕에 살면서 글을 쓰는 조는 프리드리히에게 독설을 듣는다-> 2. 그 즈음 베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프리드리히에 실망해 뉴욕을 아예 떠나기로 결심한다-> 3. 베스가 죽은 뒤 로리가 에이미와 함께 돌아온다는 소식에 놀라고, 고독함을 토로하며 자신이 로리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4, 그러나 로리는 에이미와 약혼했다->5. 프리드리히와 자신이 만났던 순간을 회상하며, 그 둘이 어떻게 친구로 발전했는지 첫만남을 다룬다->6. 프리드리히가 집에 찾아오고, 조는 자신이 프리드리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7. 떠나는 그를 붙잡고 결혼하며, 소설을 완성한다. (에이미와 로리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시퀀스1에 나온 조와 마지막 시퀀스에 나온 조가 동일인물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이 둘이 같은 것이라 여기는 것은 순전히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보려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아씨들>이라는 소설을 쓰고, 그것이 실물로 나왔다는 점뿐일 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조가 소설을 쓰며 끝난다. 끝내 우리는 이 영화에서 조가 쓰는 <작은 아씨들>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와 무관한 소설일 수 있다는 의심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소설을 쓴다"라며, "우리 인생 이야기"라 하지만 그것이 진짜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소설의 정보는 "우리 인생 이야기"와 목차가 끝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더 우리를 의심케 한다. 프리드리히와 사랑에 빠진 결혼하기로 한 조, 조와 편집자가 협상하는 씬이 겹친다. 이때 이 둘이 정확히 어떤 시간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편집자는 "왜 둘이 결혼 안 하냐?"라고 질문하고, 그때 프리드리히와 조가 끌어안는다. 이때 "결혼은 소설에서조차 경제적인 거래"라 말한 뒤 "알았다"라고 수긍한다. 이때 조가 지금 프리드리히와 결혼한 뒤 쓴 소설인가? 그 전에 쓴 소설인가? 라는 문제점이 생긴다. 전자일 경우 우리는 이 <작은 아씨들>이 지금껏 조의 인생과 무관할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 있다. 조가 굳이 독신주의자에서 회심한 이야기를 써,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우리 모두가 결혼할 수밖에 없고, 그저 그런 일상에도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딘가 조의 언행과 어긋나보인다. "결혼은 경제적 거래"라는 시니컬한 말을 하는 그녀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의식을 투영해 소설을 썼다는 편이 차라리 더 설득력이 있다. 그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사는 것도 소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조가 쓴 소설이 아닐까?라는 추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타 거윅이 이를 가능케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한 장면 때문이다. 이 영화는 조 마치가 <작은 아씨들>을 소설로 써내는 과정을 찍은 영화라 관객을 유도하면서 곳곳에 장치들을 마련해둔다. 조 마치는 더 이상 글을 안 쓴다면서 그간 그녀가 쓴 모든 글을 태운다. 그 중에는 그녀의 일기와 편지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이전의 삶을 부정하고 다시 글을 쓰겠다는 것, 그 의지에는 그 전의 자신을 잊고싶다는 욕망도 포함되어 있다. 조 마치가 유일하게 남긴 글은 베스를 위해 자신이 쓴 글뿐이다. 베스는 죽기 전 시간이 "썰물같은 것"이라고, "천천히 떠나지만 막지 못한다"고 말한다. 메기와 만날 때도 그녀는 "유년 시절이 끝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무언가가 사라져간다는 것을 마주보며, 조는 그 상실감을 극복해내려 소설로서 자신이 살지 않는 삶을 복원해냈을지 모른다. <작은 아씨들>의 이런 우울한 정서는 그 자신이 살지 못한 삶들에 대한 탄식이 녹아있다. 연극배우를 꿈꾸던 메기는 결혼하고, 에이미는 화가를 포기하고, 베스는 죽는다. 조가 이런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소설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은 이 점에서 이상하게도 <레이디 버드>를 창작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크리스틴은 시간을 계속 앞지르며 그 자신이 살고파했던 삶을 영화로 창작해내는 그레타 거윅 자신의 상상을 써내려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플래시백이 남기는 것이 어느 한 순간의 감정뿐이며, 그 불완전한 기억을 감정으로서 풀어내 복원하는 작업이 바로 <작은 아씨들>의 소설 창작 과정이다.


어쩌면 앞선 추정이 급진적일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이 영화가 조 마치의 자전소설 <작은 아씨들>을 찍은 영화라면 어떻게 될까? <작은 아씨들>의 내용이 마지막에 조가 쓴 소설 그대로라면 이 영화는 시시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레타 거윅은 독신주의자가 회개(?)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로 머물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한다. 영화에서 되풀이되는 유사한 이미지들 때문이다. 영화는 조라는 캐릭터를 다룰 때, 플래시백을 이상한 방식으로 삽입한다. 영화의 예측할 수 없는 편집점은 이때 힘을 발한다. 조가 춤을 추기 시작할 즈음, 로리(티모시 샬라메)와 처음 만나 춤을 추는 장면을 삽입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더 이상 로리와 춤을 출 수 없는 상태다.
그녀는 이처럼 불숙 끼어드는 기억과 대립하며, 더 이상 현실에 없는 것들과 마주한다. 두 번째로 조는 베스가 없는 자리에 앞서, 베스와 누워있던 장면을 상상한다. 이때 유사한 화면들이 반복되며, 어릴 때는 있던 베스가 지금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앞서 언급했듯 <작은 아씨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무언가가 흘러가고 있다는 우울의 정서다. (처칠이 우울을 검은 개라 표현했듯이) 이는 너무 급작스레 찾아오는 감정이다. 이같은 배치는 과거와 필연적으로 마주해야하고, 그것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조의 심리를 보여준다. 이처럼 유사성이 반복되는 가운데, 단 하나의 씬만이 다르게 보인다. (베스가 피아노를 칠 때, 크레인 샷으로 로렌스 백작이 들어오는 것을 비추는 씬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씬을 흔들리는 핸드헬드 숏으로 찍는다. 그러나 단 한 번 카메라가 픽스된 씬이 나온다. 바로 조와 베스가 해변에 앉아있는 씬이다. 조는 죽기 직전의 베스에게 자신이 쓴 글을 읊어주고, 베스는 그것을 글로 써주기를 바란다. 그때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 씬을 시작으로 조는 고독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조는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시간, 혹은 죽음과 마주봐야한다. 이 씬을 고정된 카메라로 찍은 것이 중요한 이유다. 유독 편집 리듬이 짧던 이 영화는 그 순간에만 씬을 길게 유지한다. 그 후로 메기가 결혼하고, 로리가 떠나는 등, 조가 겪는 고독이란 시간을 마주보는 데에서 나온다. 조는 죽기 직전의 베스에게 자신이 쓴 글을 읊어주고, 베스는 그것을 글로 써주기를 바란다. 그 씬을 시작으로 조는 고독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조는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시간, 혹은 죽음과 마주봐야한다. 이 씬을 고정된 카메라로 찍은 것이 중요한 이유다. 유독 편집 리듬이 짧던 이 영화는 그 순간에만 씬을 길게 유지한다. 그 후로 메기가 결혼하고, 로리가 떠나는 등, 조가 겪는 고독이란 시간을 마주보는 데에서 나온다.
영화는 우리가 보는 것이 현재라는 것을 알려주지만,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시간에 공존할 수 있다고 (인지하게 만드는) 이상한 매체다. 이 기억의 뒤엉킴은 <작은 아씨들>을 왜 지금 왜 써야하는가를 마련한다. <레이디 버드>가 시간의 무한성을 자각하는 영화라면, <작은 아씨들>은 시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영화다. <레이디 버드>가 이름을 바꾸었다면, <작은 아씨들>은 그 자신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책으로 결과물을 남긴다. 그레타 거윅은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난 후, 그녀의 고민을 이 영화에 담아냈다.무슨 서사를 써내려갈 수 있는가? 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살아낼 시간을 어떻게 견뎌나가는가? 혹은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작은 아씨들>의 질문일 지도 모른다. <작은 아씨들>은 시간에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나"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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