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4.5

영화교재로 쓰여도 충분한 영화 각색의 힘.

대중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양날의 칼일 것이다. 우선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뛰어나거나 대중적으로 아주 재밌는 소설이거나, 그래서 더 쉽게 공감이 되기도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새롭지 않은 이야기라서 별 흥미를 못느낄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작은 아씨들> 같은 고전이면서도 이미 수 없이 만들어진 소설이라면 그 부담감은 더 하지 않았을까?


언제나 뛰어난 소설들을 영화로 다시 재 창조되는 것들에 하나 같이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소설같지 않다' 라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뛰어난, 재밌는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을 것이고, 그 뛰어나고 재밌는 절대기준은'더 뛰어나고 더 잼있어야' 한다는 비교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절대적으로 부담감으로 다가왔을텐데 그레타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이러한 부담감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영화는 소설을 보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를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차곡하게 쌓아올린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마주하는 동안 뛰어난 원작에 대한 경의가 표해지고, 그 원작을 이렇게 멋지게 각색한 감독 그레타 거윅에 다시한번 경의가 표해질 정도다.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을 하나 하나 애정어린 캐릭터로 만들었고, 그 캐릭터를 영화적으로 소비하고 쓰임하는데 너무도 인상적인 모습이다. 특히 주인공을 비롯한 다섯 여성들의 캐릭터와 생생한 이야기는 원작의 뛰어남을 다시한번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치 역할을 한다. 원작과 영화 모두가 승리한 윈윈의 영화다.


이 원작은 모든 주인공이 여자라서 당연하게도 여자의 싯점으로 보여져야 하고, 그 여자라는 공간안에서 다섯 여성의 각각의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모두 생생하게 끊임없이 재생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당당하게 여성영화라고 불리기에도 충분한 사회적인 시선까지 놓치지 않는다.


보통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가 되다 보면 한 사람에 치우치는 경우들이 많지만, 이 영화속에서는 주인공의 시점 또한 놓치지 않으면서 그 많은 등장인물들의 동선과 이야기들을 차곡하게 쌓아올린다. 감독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좋은 시나리오, 특히 좋은 원작을 기반으로 하는 뛰어난 각색의 힘이다. 정말이지 이 영화의 각색은 영화의 교본으로 쓰여도 좋을만큼 최고의 각색의 힘을 보여준다.


특히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넘나들며 재배치 한 교차편집은 영화라는 공간은 분명하게 소설과는 다른 부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면서도 원작의 뛰어남을 부각시키고, 엔딩의 마무리는 영화적인 효과를 가장 극대화 시키면서도 원작에 대한 경의가 느껴지기도 할만큼 멋지다.


주인공의 다섯 여성 캐릭터 외에도 등장인물 모두 하나 하나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지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어딘가에는 쓰임이 있다는 말이 생각날 만큼 이 영화속 등장하는 그 어떤 캐릭터들도 의미없이 소비 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최고의 각색이다.


영화의 미흡함으로 원작에 대한 누 가 되는 경우들을 수시로 보지만, 시대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지금 현재의 모습에 가장 적절하게 조화하면서도 원작의 훼손을 최소화 시키는 모습은, 누 가 되기는 커녕, 이 영화로 인해 원작소설의 뛰어남까지 다시한번 실감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작은 아씨들>을 보는 135분의 시간은 원작속에서 오롯하게 느낄 수 있었던, 가족의 소중함과 당시 시대의 여성으로써의 모습, 그리고 여성이라는 존재감을 현재의 시각에 맞게 부각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삶까지 그대로 영화로 반영되면서 아주 오랜 시간 그 작은 아씨들이 살아간 시간의 긴 여운에 빠져들기에 충분한 시간이 된다. 지금까지 영화로 나온 <작은아씨들>을 모두 본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본 영화 <작은아씨들> 중에서는 최고다.



"우리가 이땅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음은 이 땅에서 보낸 유년 시절 때문이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따던 그 꽃들이 봄마다 이 땅에 다시 피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모든 것이 자명하고 자명하기에 사랑받는이 달콤한 단조로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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